청우헌수필

구불구불 가는 길

이청산 2014. 2. 24. 10:50

구불구불 가는 길

 

어느 날 시외버스정류장에서 곧 출발하려는 차를 타고 있는데, 한 승객이 바쁜 걸음으로 뛰어오더니 운전기사에게 급하게 묻는다.

이 차 바로 갑니까?” 기사가 말하기를,

아뇨. 길이 구불구불한데 우째 바로 갑니까?”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빙긋 웃었다. 목적지까지 직행하느냐는 물음에 기사는 엉뚱한 말로 사람들을 웃음 짓게 했다. 다급히 타려던 사람도 잠시 거친 숨을 고르고 얼굴에 살짝 미소를 그으며 올라탔다.

차가 출발했다. 길은 기사의 말대로 구불구불했다. 기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하며 하품 한 번하지 않고 잘 달려 나간다. 쪽 곧게만 뻗은 길이었다면 즐기듯 그렇게 달려 갈 수 있을까. 가쁜 숨 몰아쉬며 타는 승객을 미소 짓게 만들 수 있었을까.

한촌으로 우거해 와 살면서 몇 해를 지나는 동안, 매일 해거름이면 운동 삼아 오르는 산이 생겼다. 마루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면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길은 거의 곧게 뻗어 올라간 아주 가파른 가르맛길이다.

그 가풀막에 누가 힘들여 나무를 잘라 가로목을 대어 간간히 층계를 만들어 놓았다. 모두 삼백여 개나 되는 가로목이 놓여 있는데. 심하게 가파른 마루 턱밑에는 무려 백일흔세 개나 놓아 사다리처럼 곧추 선 계단 길을 만들었다. 그 공력이 고맙기는 했지만 밟아 오르기가 무척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건 볼 겨를도 없이 계단을 열심히 밟아 오르다보면 숨결이 거칠어지고 다리도 팍팍하여 마루에 올라서면 후들후들 떨리기까지 한다. 오를 때마다 등판에 땀이 촉촉이 배는 걸 보면 운동은 많이 됐을 것 같다 싶으면서도, 운동도 좋지만 즐기면서 오를 수도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날마다 오르는 사이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긴 했지만, 시시로 다른 빛깔과 자태를 보여주는 나무들을 안아보기도 하고, 맑고도 정겨운 산바람을 들이마시기도 하면서 오르내리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좀 더 나긋하고 느긋한 길을 찾아보려고 가파른 산자락을 헤맸다. 옛날에 나무꾼이 나무하러 다니지도 않았나? 미끄러지고 자빠지기도 하고, 가시에 걸려 손이 찔리고 옷이 찢기기도 하면서 찾아보아도 산은 못내 가파르기만 했다.

별로 높지도 못하면서 이런 험산 악산이 있나, 그렇게도 반반한 곳이 없담? 길을 찾다 못해 속이 끓으면서 미움과 원망마저 차올랐다. 이래서 그 가파른 곳에 가로목을 질러 층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가.

팍팍한 다리를 끌며 계속 그 층계를 딛고 다녀야 할까. 약간의 절망감을 안고 수풀 속 가파른 내리막을 짚어나가고 있는데, 가로로 비스듬히 오르내리며 나있는 작은 발자국들의 행렬이 보였다. 짐승들이 지나다닌 자국인 듯했다. 순간, 무슨 중요한 발견이라도 한 듯싶은 작은 경이감과 함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던가. 저처럼 굽이지어 내려가면 될 걸,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게 없네! 짐승처럼 가풀막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우거진 숲을 돌아 구불구불 내리막길을 찾아 내려갔다. 찍어야 할 발자국 수는 늘어났지만 가풀막은 조금씩 느슨해지고 미끄러질 일도 잦아들어 갔다. 미치지 못한 생각은 돌아보지 않고 애먼 산만 탓했구나.

다음 날은 어제 밟았던 길을 더듬어 오르고, 내려 올 때는 올랐던 발자국을 다시 밟으며 내렸다. 그렇게 며칠을 거듭하는 사이에 가파른 비탈에 지그재그 구불구불 나만의 길이 생기고, 길은 점점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낸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막길로 하고, 가파른 계단 길을 내리막길을 삼아 산을 오르내리기로 했다. 걸리는 시간은 조금 늘어났지만, 더 걸리는 시간이 내 몸과 마음에 여유를 더해주는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깊은 생각이 필요치 않았다.

굽고 뻗은 나무들이며 그 나무를 치장하고 있는 잎사귀들에 더 많은 눈길을 줄 수 있고, 지저귀는 새소리며 스쳐가는 바람소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여간 즐겁지 않다. 거친 가풀막도 구불구불 길을 내면 이리 안락한 길이 되는 걸 왜 진작 몰랐던가.

나는 이러저러한 연유로 운전을 안 하고도 못한다. 자리를 옮길 때는 주로 버스를 많이 탄다. 불편할 때가 참 많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빠른 시간에 무슨 일을 처결해 내기도 어렵다. 그러나 타고 갈 때의 여유로움을 생각하면 그 불편과 어려움은 달게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달리는 차 안에서의 사유는 전부 내 자유다. 스쳐가는 풍경에 주는 눈길과 마음도 온전한 나의 것이다. 이곳저곳 구불구불 달리면서 구불구불 생각을 이어가는 길이 구불구불한 구비만큼이나 즐겁다.

내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참 구불구불 일도 많았다. 아리기도 하고 뉘우쳐지는 일도 없지 않지만, 구불구불 살아왔기에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고 접고 싶지도 않다.

구불구불 살아온 날들처럼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그렇게 사는 길 밖에 없을 것 같다. 구불구불 가는 길-.(201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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