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촌의 추위

이청산 2014. 1. 8. 10:59

 

한촌의 추위

 

 

산과 들과 강과 함께 사는 한촌의 겨울은 유달리 춥다. 아랫녘 도시 보다 4,5도는 더 춥고 윗녘 대처보다 더 추울 때도 있다. 다른 곳보다 눈도 많이 오고 바람도 세차게 분다.

겨울이면 지상에 있는 것이란 얼지 않는 것이 없다. 지난해는 겨울을 나고 나니 나무들도 추위에 떨다 못해 얼어 죽은 게 있고, 심지어는 대나무마저도 하얗게 얼어 죽기도 했다.

석유로 불을 지펴야 하는 나의 집은 추위에 대한 인내심이 특별히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석유라는 게 마구 펑펑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웬만한 추위는 껴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한촌에 겨울이 오면 한촌(閑村)은 그야말로 한촌(寒村)이 된다. 그러나 한촌 사람들은 추위를 결코 탓하거나 굳이 내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춥기도 하고 눈도 내려서 겨울이 겨울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추위를 즐기고 이겨내려 할 뿐이다.

겨울 추위를 두고 도시 사람들이 난방비를 걱정할 때, 한촌 사람들은 추위가 매서울수록 농작물의 병충해를 적게 할 것이라며 기뻐한다. 눈이 내려 쌓이면 도시 사람들이 자동차 운행을 걱정할 때, 한촌 사람들은 물이 풍부해져 풍년이 들 것이라며 좋아한다.

겨울은 추워야 제격이라며 시린 추위도 기꺼이 감수하는 한촌 사람들이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체념(諦念)이 아니고 감수(甘受). 그 감수가 한겨울 모진 추위도 즐거이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서양 말로 레지그네이션(resignation)’이라는 어휘 속에는 그 뜻을 다 내포하고 있는 걸 보면 체념이나 감수는 한 뿌리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체념과 감수가 그리 같은 말은 아닌 듯하다. ‘체념이 수동적, 소극적이라 한다면 감수는 능동적, 적극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한촌 사람들은 추위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겨울이 없고 추위가 없다면 땅인들 사람인들 어찌 잠시 쉴 겨를이 있을까 보냐며, 추위를 편안한 휴식의 시간으로 여기기도 한다. 한촌 사람들은 그렇게 혹한의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그런 믿음과 생각만으로 한촌 사람들이 추위를 이겨내는 것은 아니다. 한촌 사람들에게는 추위를 이겨내는 아주 따뜻한 방법이 또 있다. 그들은 모인다. 마을 회관은 한촌 사람들의 겨울 보금자리다. 회관에 불을 지피고 모여 앉는다. 그리고 누구는 김치를, 누구는 콩나물을 가져와서 함께 모둠밥을 짓는다. 때로는 대처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고향의 노부모를 위해 한촌에는 귀한 먹거리들을 부쳐오기도 하고, 들고 찾아오기도 하여 회관이 더욱 따뜻해진다.

손을 돌려가며 밥을 짓는다. 돌아가면서 지은 밥으로 따뜻한 방에 앉아 따뜻한 밥을 먹으며 따뜻한 마음을 함께 나눈다. 마치 남극 황제펭귄의 허들링처럼-.

황제펭귄은 천적을 피하여 찾아온 빙하지역의 영하 50도도 넘는 극한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어떻게 추위를 이겨내는가. 선 채로 서로 촘촘히 몸을 맞대고 원을 만들어 체온을 모은다. 그러면 바깥보다 10도나 더 높은 따뜻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바깥쪽을 지키는 것들은 몹시 추울 테지만, 그대로 얼게 두지 않는다. 안에 있던 것은 밖으로. 밖에 있던 것은 안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그 위치를 바꾸어 나간다. 그것이 바로 허들링(huddling)이라는 것이다.

황제펭귄은 이 허들링을 통하여 모진 추위를 이겨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부화를 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 모여서 체온을 나누고 돌려가며 마련하는 모둠밥으로 추위를 이겨낼 뿐만 아니라, 마음들을 한데 모아 따사로운 인정의 꽃을 피워내기도 한다.

고추바람이 불던 어느 날 회관에 소담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어떤 이가 이 한촌이 물 좋은 곳이라고 찾아들어 들판 가장자리 한 곳에 조그만 양어장을 지었다. 지난가을부터 해오던 공사를 이제야 마무리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며,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기르는 고기를 회로 떠서 차린 상을 앞에 놓고 인사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답게 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한 마을에 살면 정 두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며 모두들 새 이웃을 반겼다. 몇 년 전 내가 한촌에 들어올 때 반겨주던 모습들이 떠올라 입주 인사 잔치 자리가 더욱 따사롭게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은 한촌을 찾아와 사는 사람을 아주 반긴다. 이웃하나 더 생기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고 한다. 내 집, 네 집 없어 터놓고 다닐 곳이 한 집 더 늘어난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 아니냐며 품을 벌린다. 이 마음의 허들링이 한촌의 추위를 이겨내게 하고, 즐길 수 있게 한다.

매운바람이 불고 있다. 사람들은 회관으로 모인다. 그리고 모둠밥을 짓는다.

한촌의 추위는 추위가 아니다. 생기로운 삶이다. 따뜻한 인정의 꽃바람이다.(2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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