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계절이 쌓여가고 있다

이청산 2013. 11. 25. 11:58

계절이 쌓여가고 있다

 

일손이 바쁜 탓인지 찬바람이 몇 차례나 불 때까지도 감나무의 감을 그대로 달아두던 이웃에서 드디어 감을 모두 따 내렸다. 아무리 바빠도 더는 둘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들판이 다 비었다. 들판을 덮고 있던 볏짚들도 다 걷혀지고 벼 벤 그루터기만 스산하게 남았다. 집집마다 김장이 한창이다. 한 계절을 보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계절이 가고 오고 있다. 계절을 따라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세월은 흐르는 것일까. 평생을 무욕으로 살았던 법정 스님은 내 생애에서 또 한 해가 빠져나간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인가?”라며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고 있다.

세월은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세월은, 시간은 흘러가기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에게 남아 있는 나이며, 그 나이 속에 들어 있는 기억들은 다 무엇인가. 그 기억 속에 쌓여 있는 기쁨이며 슬픔, 즐거움이며 괴로움, 평온이며 울화, 사랑이며 미움 들은 다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나는 여기서 철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시간은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말을 상기하고 싶다. 시간은 존재를 품고 있다는 말이겠다. 그 존재 속에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나이가 담겨 있고 기억도 담겨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쌓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누구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킴벌리 커버거)”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나는 부자다. 부자란 결국 돈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유형무형의 자산을 많이 가진 사람일 테니까.(박어진)”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나이 속에, 시간 속에 들어있는 지식이며 경험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에게 시간은 흘러 왔을지언정 결코 흘러가지 않았다. 시간은 이들의 속에서 지식과 경험이 되어, 무형의 자산이 되어 쌓여 있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많은 시간들이 쌓여왔다. 나의 어느 글에서 지난 세월이 주마등 되어 머리와 가슴속을 흘러간다. 그 속에는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도 딱지 앉은 생채기처럼 똬리를 틀고 있고. 언제까지나 고이 보듬어 간직하고 싶은 시간들도 함초롬히 핀 들꽃처럼 자리 잡고 있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어가는 일은 쌓여지는 시간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요, ‘늙음이라는 것은 곧 적지 않은 시간의 쌓임이란 뜻이 아닐까. 따라서 시간이란, 세월이란 흘러오기는 할지라도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와 내 속에 쌓여지는 것이리라. 지금도 나에게는 시간이 쌓여가고 있다.

어떤 시간이 쌓이고 있는가?’, ‘어떤 시간을 쌓아야 하는가?’는 따로 생각할 문제다. 저마다의 삶의 방법이나 관점에 따라 쌓여지는 시간의 모습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남에게도 나누어줄 수 있는 유형무형의 자산이 될 수도 있고, 별 가치 없는 무해무득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괴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마치 같은 재료로 무얼 만들어도 만드는 이에 따라 그 모양이 다 다를 수 있듯이-. 나에게 쌓여진 시간은 어떤 것들인가.

어쨌든 세월이란 나를 흘러가는 것도, 나를 빠져 나가는 것도 아니다. 흘러와 나에게 쌓여지는 것이 세월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바로 쌓여진 시간을 내려놓는 일이다.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든, 간직하고 싶은 것이든 그 시간을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 곧 죽음일 것이다. 나에게 쌓여진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까지는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시낭송 모임의 정기 낭송회에서 나는 조창환 시인의 나는 늙으려고를 낭송하였다. 낭송해 보고 싶은 시였다.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보다.”로 시작되는 시다.

늙음이란 곧 시간의 축적이 아니던가. 나는 내게 쌓여지는 시간을 갈무리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세상의 끝이 어디인가.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서있는 곳이 세상의 끝이 아니던가. 항상 나는 시간의 끝, 세상의 끝을 살고 있다.

그 끝에 이르기까지 나는 세월을 쌓아왔고, 쌓아가야 하고, 기꺼이 쌓아갈 것이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나에게 쌓여지는 시간들이 가능하면 그리움과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월이 나에게 쌓여지기를 바랄 뿐이다.

의학계의 연구와 심리학자의 논의에 따르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는 칠십 대라고 한다. 더 많은 지혜와 추억과 경험과 자유 시간, 그리고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라 한다. 바로 나이를 먹어가는 즐거움이 아닐까. 세월을 쌓아가는 보람이 아닐까.

조창환의 나는 늙으려고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적막하고 고즈넉한 물에 비친 달은 붉게 늙었다.……

호수는 이 세상일 터, 세상살이가 적막하고 고즈넉할지라도 이 시에서처럼 붉게늙었으면, 그렇게 시간을 쌓아 갔으면 좋겠다. 온기와 열정이 깃들여 있는 세월을 차곡차곡 재어 갔으면 좋겠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 따뜻한 손길이 그립다. 그런 시간이 그립고, 그런 사람이 그립다.

계절이 흐르고 있다. 아니, 계절이 따뜻한 켜를 이루며 쌓여가고 있다. (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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