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스물다섯 번의 만남

이청산 2013. 12. 18. 13:13

스물다섯 번의 만남

 

그 친구와 참 오랜만에 만났다. 멀리 있을 때는 멀어서 만나기 어렵다지만, 그리 멀지 않게 있는데도 몇 달 만에야 만났다. 물론 마음이 멀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와 처음 만난 지도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 직장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그와 같이 근무한 것은 고작 한 해, 그리고는 서로 가야할 길을 따라 헤어졌다.

비록 한 해뿐인 인연이었지만, 우린 그 때 시간의 양을 넘어서는 깊은 정을 쌓았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주로 문학과 연극 이야기, 아니면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안주로 삼아 호기를 채우며 술잔을 비우곤 했었다.

그는 햄릿 역할도 해보고, 연출도 해본 경험을 되새기면서 주로 연극 쪽의 이야기를 많이 했고, 나는 어설픈 문학 이야기로 그의 재미난 이야기에 박자를 맞추려했다. 그가 셰익스피어며 엘리어트를 이야기할 때 나는 피천득이며 박인환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별 깊은 조예나 재주는 없을지라도 그냥 그런 이야기가 좋았다.

자리를 같이 한 날은, 이야기보다 술이 먼저 떨어지거나 너무 이슥하다고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해야 하릴없이 일어섰다.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와 술잔 깊숙이로 정을 쟁여나갔다.

그와 헤어지고도 술잔 속에 담가 둔 정을 잊지 못하고 서로의 사는 곳을 찾아다니며 한 해에 한두 번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 번도 못 만나고 해를 넘기기도 했지만 술잔 속의 정은 삭아질 줄을 몰랐다.

그 사이에 세월이 쌓여갔다. 그도 나도 이순의 고개를 넘어서면서 한 생애를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건사해 나가야 했다. 그는 도시에 눌러앉았고, 나는 산이 있고 강이 있는 한촌을 찾아와 두그루부치기 삶을 시작했다.

그 세월 속에서 그의 연극과 나의 문학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조율에만 열중하고 조율에만 만족’(이청준, ‘조율사중에서)하게 된 연주가였던 조율사처럼 연극에 대한 향수만을 보듬고 있고, 나는 어쭙잖은 글줄을 쓴답시고 간혹 지면을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들 이야기는 지금도 그와 나의 지난 시절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무늬로 남아있다.

이 또 무슨 인연인지, 그가 내 사는 한촌 가까이로 오게 되었다. 한 생애를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중한 어학 지도 실력을 높이 산 어느 학교에서 그를 과외 강사로 초빙했던 것이다. 마침 내가 사는 마을에서 머잖은 읍내에 있는 학교였다.

꿈결에서 만난 듯 반가웠다. 읍내 어느 곳에서 이산가족처럼 감격의 상봉을 했다. 학교에서 숙식까지 다 편의를 봐주어 생기로운 아이들과 함께 재미나게 지낸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우리에게 쌓인 추억의 양만큼 통음하며 삼십여 년의 세월을 헤아려 나갔다. 이제 자주 만나면서 살자고 했다.

그의 딸이 결혼할 때 내가 주례를 서기도 하고, 부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와 경치 좋은 곳을 같이 거닐기도 했지만 마음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마음속의 시간과 현실 속의 시간이 같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내가 먼 길을 다녀오던 길에 정류장으로 나를 찾아 나온 그와 모처럼 만났다. 어느 술청에 앉아 우리의 젊은 시절 속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달빛을 보고 조명 좋고!’라 감탄하며 즐거이 술잔 속의 달빛을 마시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 즐거움으로 돌아가 술잔을 들다가 그는 문득 회심의 미소를 술잔에 담갔다. 빛바랜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었던 연극을 만났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축제를 하는데 아이들의 연극을 지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했다. 이제야 이런 기회가 오다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란다. 그가 만들어낸 연극을 무대에 올렸을 때, 모두들 감탄해 주는 것도 참 즐겁더라고 했다.

그는 조율에만 만족하고 있던 조율사는 아니었다. 연주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었다. 마침 나는 문학회 동인지 출판기념회에 다녀오는 길이어서 그에게 동인지 한 권을 주었다.

오랜만에 문학과 연극 이야기를 안주 삼아 목 놓아 술잔을 비우며 간 시간과 갈 시간을 쫓고

 있는 사이에 사륵사륵 밤이 깊어갔다. 친구가 문득 말했다.

앞으로 한 스무 번은 만날 수 있겠지? 한 해 한 번씩이라면-.”

에이, 다섯 번만 더 보태!” 내가 외쳤다.

좋아, 스물다섯 번으로 하지! 아니야 쉰 번으로 하면 어떨까?” 그가 호기롭게 말했다.

쓰는 김에 좀 더 써! 일흔다섯 번이 어때?” 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통 크게 쓰자! 딱 백 번으로 하지, 백 번! 하하하!”

철마다 한 번씩? 그 거 좋지! 하하하!”

우리의 오래된 문학과 연극이, 깊어가는 밤과 쌓여있는 세월이 호기로운 웃음의 도가니 속으로 오롯이 녹아들었다.

손을 잡고 일어섰다. 길가의 불빛이 모두 우리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타야할 차가 왔다. 잡고 있었던 손을 놓고 차를 탔다. 그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스물다섯 번은 기본이고!”(201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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