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현재를 위하여

이청산 2013. 12. 28. 09:49

현재를 위하여

-한 해를 보내며

 

한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며칠 후면 벽에 달력이 바뀌어 걸리면서 다 뜯어져 나가고 한 장 남았던 묵은 달력은 마침내 자리를 비켜주고 벽을 내려와야 한다.

이 무렵이면 사람들은 공연히 걸음이 분주해진다. 지나온 자취들이 돌아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바삐 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할 것도 같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를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갈무리해야 할 것이고, 무엇을 새로 바라야 할 것인가. 사람들은 궁리에 잠기기도 하고 조바심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달라진 것이란 없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너는 어디로 가서 밤이 되었느냐 너는 어디로 가서

들판이 되었느냐 나는 여기에 있다 여기서

이를 닦으며 귀에 익은 노래를 듣는다

                                             -박주택, ‘하루에게

 

시간이 흘러갔을 뿐, 나는 일상의 그 익숙한 움직임 속에 그대로 있다. 아니, 시간도 흘러가지 않았다. 흘러와 내 속에 쌓여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속에 쌓여진 시간의 양이 조금 더 늘어나 있을 뿐이다.

한 해가 간들 무엇을 돌아보아야 한단 말인가.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은 내 안에 쌓여있다. 새로운 해가 온다고 한들 무엇을 내다 봐야 한단 말인가. 내가 바라고 내다보지 않아도 그것은 내게 와 쌓일 것이다.

오늘은 어떤 날인가? 오늘이 곧 어제이고, 내일이 아니던가. ‘오늘이란 어제와 내일의 징검다리이기도 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 그 자체이다.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과거와 미래의 그 접점에 있다. 현재가 곧 과거고 미래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오늘이라는 날짜만, ‘현재라는 시간만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를 떠날 수도 없고, 떠나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현재를 묻어버린 과거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이며, 현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미래가 어떻게 나를 이끌 수 있을 것인가.

루즈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미국에서 가장 존경스런 여성으로 손꼽히는 애나 엘리노어 루즈벨트(Anna Eleanor Roosevelt 1884~1962)는 어느 편지에서 어제는 히스토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이며 오늘은 프레젠트이다.”라 했다고 한다.

현재(Present)가 바로 선물(Present)이라는 말이다. 현재란 선물처럼 아끼고 감사하게 간직해야 할 것이란 말이겠다. 현재를 잘 보듬고 관리하는 일만이 아름다운 과거를 만들 수 있고 빛나는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이겠다.

나의 어느 글에서 금과옥조처럼 인용했던 다산 선생의 어록을 다시 떠올린다.

가버린 것을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을 기약하지 못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다.”

다시 새겨 봐도 사람살이에 이보다 더 절실한 말은 없을 것 같다.

이제 며칠 후에는 달력을 갈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간 한 해를 별로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다가올 새해에 대해서도 그리 큰 환호도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지금 현재의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새겨 보고 싶다.

돌아보면 부끄럽고도 아릿한 기억들이 참 많다. 그 흔적 모두 싸안고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은 지난 일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과거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현재를 바로 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가올 나의 삶인들 이 순간을, 현재를 잘 건사하지 않고서야 어떤 즐거움과 행복이 나에게로 올 것인가.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나를 찾아올 것인가는 현재를 어떤 모습으로 가꾸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새해가 온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고 이를 닦던 오늘처럼 담담히 맞이하겠다. 특별한 맹세도 하지 않겠다. 다만, 그리워하고 싶은 것을 순정 가득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싶은 것을 진정 다해 사랑하기를 애쓰겠다.

그 그리움과 사랑의 길을 조용히 걷겠다. 내가 걷는 길은 이런 길이었으면 참 좋겠다.

 

감사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

                  -이해인, ‘감사 예찬(201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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