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11월의 빛깔

이청산 2013. 11. 9. 10:28

11월의 빛깔

 

11월이다. 산이 한창 빛깔지고 있다. 가을이 흐른다. 사과빛처럼 감빛처럼 익어가던 가을이 마침내 들판의 황금물결을 모두 싸안아 잠재우고 스스로 찬란한 물결이 되어갔다.

가을이 들판을 휩쓸 때 들판도 힘으로 넘쳤다. 콤바인이며 트랙터며 베일러가 우렁찬 굉음을 내며 들판을 싸말아 가을의 큰 품안으로 한껏 밀어 넣어 주었다. 황금물결을 안아가고 있는 가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황금빛 미소가 넘쳐난다.

가을은 들판의 황금을 품으며, 사람들의 미소를 머금으며 흠뻑 황금빛 물이 들어갔다. 드디어 들판을 잠재운 가을은 요란하고 분주한 기계소리를 등에 지고 힘차게 산으로 내닫는다. 산으로 오르면서 가을은 더욱 현란한 빛깔들로 장식된 옷을 갈아입는다. 가을은 지상의, 아니 세상의 모든 빛깔을 산에다가 옮겨 놓는다.

가을의 빛깔은 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조식(曺植)이 삼홍시(三紅詩)에서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까지도 붉더라.”라고 노래한 것처럼 산을 담고 있는 물에도 있었고, 따뜻하고도 눈부신 산빛을 바라보는 한촌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도 있었다.

뒷집 조 씨가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가을이 들판을 휘젓던 날이었다. 그의 황금들을 가을 품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가을의 넉넉한 품을 감사하며 마련한 자리였다.

농사보다 배짱 편한 일이 어딨어? 세월만 가면 금이 줄줄 쏟아지지, 논두렁을 베고 잔들 누구 뭐라나! 하하하

콤바인 기사 안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을이 홍소를 터뜨리는 것 같았다.

세상의 고운 빛깔들이 다 모인 한촌의 풍성하고 찬란한 가을 빛깔만큼이나 사람들의 가슴에도 곱고 따뜻한 빛깔이 넘쳐났다.

모개나무할매 집 감나무에 주황빛 홍시감이 전등불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감나무도 없는 집에 감이 귀하지 않겠느냐며 손수 딴 감 한 광주리를 들고 왔다. 결 보드라운 호박잎 몇 잎도 따 얹어 왔다.

옆집 망두걸댁은 자기 고추밭에 끝물 고추 좀 따 가라니 왜 진작 안 따느냐고 닦달한다. 채근에 못 이긴 채하며 밭으로 고추를 따러 간다. 아직도 붉고 푸른 고추들이 멀쑥한 대궁에 숭숭 적잖이 달려 있다.

한참 고추를 따고 있는데, 저 건너 밭머리 안산집에서 자기 밭에 있는 총각무도 좀 뽑아가라며 갓 타작한 콩을 됫박 좋이 들고 왔다. 하나 있는 사과나무에서 딴 사과도 몇 알 함께 가지고 왔다. 무를 뽑을 때는 대파도 한 단 뽑아 주었다. ‘고마워서 어쩌느냐!’ 하니 있을 때 안 갈라 먹으면 언제 갈라 먹느냐!’고 한다.

고추가 잔뜩 든 자루를 메고, 콩이며 사과며 무를 들고 집으로 오면서 아내는 큰 걱정을 한다. 저 인정들을 어찌 다 갚느냐는 것이다. 오는 장날 장에 가서 자반고등어라도 몇 손 사 와야겠다며 얼굴을 물들인다.

11월의 빛깔은 따뜻하고도 찬란하다. 정겹고도 눈부시다. 저 산의 빛깔을 보라, 여러 결의 명도와 채도로 붉고 노랗고 푸른 빛깔들이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신가. 얼마나 따뜻하고 정겨운가.

누가 11월의 나무를 두고,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거나,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황지우, ‘11월의 나무’)고 했던가.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겸연쩍어 하지도 않고, 삶을 가렵게 여겨 털어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따뜻하고 찬란한 빛깔을 품고 있을 뿐이다. 다시 올 계절의 싱그러운 빛깔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11월의 저 빛깔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따뜻하고 정겹다. ‘있을 때갈라 먹고 싶어 하는 마음들은 저 산의 찬란한 빛깔들보다 더 눈부시지 않는가. 모든 것을 있게하는 가을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따뜻한 빛깔을 있게 하고, 정겨운 마음을 있게 하는 가을이-

한촌의 사람들은 빛깔 찬란한 잎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누구도 쇠락을 말하지 않는다. 저 산이 저렇게 물들지 않고, 저 잎이 떨어지지 않으면 어찌 봄을 맞이할 수 있으랴, 저 들에 어찌 황금물결을 일게 할 수 있으랴.

저 잎들이 저렇게 떨어지는 것도 곡식을 거두고 과실을 딸 수 있는 것만큼이나 고마울 따름이다. 한촌의 낙엽은 땅으로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가슴속으로도 떨어져 부요한 계절의 든든한 약속이 된다. 따뜻한 믿음이 된다.

11월이 흘러간다. 따뜻하고 정겨운 믿음의 빛깔로 11월이 흘러가고 있다. (201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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