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는 늙으려고

이청산 2013. 10. 27. 15:43

나는 늙으려고

 

이번 정기회에는 나도 낭송에 참여하기로 했다. 회원들은 두 달마다 한 번씩 열리는 정기 낭송회에서 돌아가면서 몇 사람씩 낭송을 하고 서로 평가하며 낭송 기량을 다듬는다.

낭송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먼저 낭송할 시를 선정한 다음, 일주일에 한 번씩 낭송 연찬실에 모여 낭송 전문가인 회장님의 지도를 받으며 연습에 임한다. 회원들의 낭송 연습을 위해 한 회원이 제공한 원룸을 우리는 낭송연찬실이라 부른다. 고마운 연찬실이다. 회장님은 매주 월요일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연찬실로 달려오신다.

낭송시를 무엇으로 할까. 이것저것 찾다가 문득 눈에 확 뜨이는 제목 하나를 발견했다. 조창환 시인의 나는 늙으려고. 늙으려고? 국어사전을 보면 ‘-려고라는 어미는 어떤 행동을 할 의도나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라 했다. 늙을 의도나 욕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 시가 읽고 싶어진다. 호기심이 솟는다.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보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적막하고 고즈넉한 물에 비친 달은/ 붉게 늙었다 저 괴물 같은 아름다운 달/ 뒤로 부옇게 흐린 빛은 오로라인가/ 이 궁벽한 모텔에서 아직 다하지 않은 참회의/ 말 생각하며 한밤을 깨어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어디론가 사라질/ , 징그러운 얼굴들 뿌리치려 밤 새/ 몸 흔드는 나뭇잎들, 아주 흐리게 보이는/ 소리 사이로 눈발 같은 미련 섞여 있어/ 눈물겹다 세상의 길이란 길/ 끝에서는, 삭은 두엄 냄새 같은, 편안한/ 잠 만날 줄 알았건만 아직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저 기막힌 그리움/ 벗어 놓는단 말인가 부끄러운 나이 잊고/ 한밤을 여기서 늙어 머리 하얗게 세도록/ 바라본다 허망한 이승의 목숨 하나가/ 몸 반쯤 가린 바람 사이로 흔들리는 것을 (조창환, ‘나는 늙으려고’)

 

낭송을 해보고 싶었다. 회장님은 시를 낭송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워야 하고, 외우기를 애쓰기 전에 나름대로 해석을 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생각하면서 외고, 외면서 생각해 본다.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 보다.’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원하든, 원치 않든 사는 일은 늙어가는 일이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늙음의 자리에 내가 서있다. 마치 늙으려고 살아온 것 같다.

늙다라는 동사나 노인이라는 명사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인 줄 알고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엘 갔더니 삼천 몇 백 원씩 받던 진료비를 갑자기 천오백 원만 내란다. 보건소에서는 독감 예방주사도 무료로 놓아 준단다. 지하철도 공짜로 태워준단다. 내가 늙었단 말인가, 늙으려고 살아왔단 말인가.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어디가 세상의 끝인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세상의 끝이 아닌가. 살아갈수록 그 끝의 자리가 달라질 뿐이다. 보다 길고 빛나는 끝을 위하여 우리는 아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맞아, 북두칠성은 세상의 옳고 그름을 다스리며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별이라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 별에 무병장수를 빌곤 한다지. 그 별이 발을 적시는 호수는 바로 이 세상이겠네. 세상은 원래 적막하고도 고즈넉한 곳 아닌가. 그 물에 비친 달은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닐까. 내 얼굴일 수도 있고. 붉게 늙은 것은 열정을 다해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괴물 같은 아름다운 달'? 기발한 역설이구나.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얼굴! 극지방 제일 높은 대기 속에서 내뿜는 오로라(aurora), 그 빛을 등에 지고 살아왔구나.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과 고이 보듬어 간직하고 싶은 시간들이 함께 어깨를 겯고 있는 내 지나온 생애가 영상이 되어 흘러간다.

궁벽한 모텔’?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夫天地者 萬物之逆旅, 李白-春夜宴桃李園序)’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세상을 모텔이라 한 말은 처음 들어보겠다. 재미있다. 어쨌든 세상을 살다보면 참회할 일도 많겠지. 자다가도 문득 깨어 참회를 할 때도 왜 없을까.

언젠가는, 반드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게 우리의 삶이지, 당연한 사라짐앞에서 무슨 미련이 있을까. 그러나 차마 두고 떠나기 안타까운 게 있다면, 그것은 징그러운 얼굴이리라. 징그럽도록 그리운 얼굴이리라. 뿌리치려 한들 쉽사리 뿌리쳐질 일이던가. 아주 흐리게 보이는 소리(소리를 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눈이겠지) 같은 가물가물한 세상 속에서 눈발 같은 애잔한 미련 때문에, 그 미련이 가슴을 움켜잡고 있어서 삶이 눈물겹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살다 보면 방하착(放下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날아갈 듯 가볍게, 홀가분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잘 삭은 두엄의 구수한 냄새같이 아주 편안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내려지지 않는 게 있다.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참 기막히다. 벗으려 할수록 더욱 진득한 미련이 되어 온몸을 감아든다. 뿌리치려 할수록 앙가슴을 아리게 파고든다. 세상의 끝에 선들 어찌 내려질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저승에까지도 끈질기게 따라 붙을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부끄러운가. 아니다. 그리움 한 꼭지 없이 살아온 나이라면 부끄러울지도 모른다. 내려놓을 수 없는, 내려지지 않는 그리움을 지고 있는 나이라면 늙어도 부끄럽지 않다. 어디에서 어떻게 늙어도 좋다. 머리가 하얗게 새도록 바라볼 그리움이 있다면-. 그런 목숨이라면 어찌 허망할까. 알 듯 모를 듯한 세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목숨이라 한들 어찌 허망하기만 할까. 삶이란 어차피 흔들리며 피는 꽃이 아니던가.

시인의 의중이야 어떻든 읽고 싶은 대로 읽는다. 이렇게 읽고 보니 이 시가 나에게 안겨 오는 것 같고, 내가 이 시의 품속으로 깊숙이 빨려들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안겨 오고 빨려들고 있다.

쉽게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것이 될 것 같다. 내 이야기인 것 같다. 아니, 바로 나의, 내 생애의 이력서다. 다음 주 연찬실에서 회장님을 만나면 들려드려야겠다. 내 생애의 이야기를 들려드려야겠다. 회장님, 어느 대목에서 눅진한 악센트가 필요할까요? 회장님께서도 벗어놓을 수 없는 그리움이 있으신지요?

물 맑게 흐르는 강둑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시를 왼다. 물소리가 정겹다. 저 물에도 밤이면 북두칠성이 내려와 발을 적실까. 붉은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벗어놓을 수없는, 그리운,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보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적막하고 고즈넉한 물에 비친 달은

붉게 늙었다 ……. (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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