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내의 텃밭·3

이청산 2013. 10. 11. 23:13

아내의 텃밭·3

 

들깻잎을 다듬는다. 아내가 들깨를 베어 거두면서 훑어낸 것이다. 하나하나 족족 펴서 가지런히 포갠다. 혼자 다듬기가 지만하다며 거들어 달란다. 간장 부어 절일 거라고 한다. 한 손에 쥐일 만큼 되면 바늘로 가운데를 꿰어 묶는다. 누렇게 물든 것도 좋고, 벌레가 좀 먹은 것도 괜찮단다. 수북하게 쌓여있던 이파리가 손을 모으니 지루하지 않게 갈무리되어 갔다.

어제 저녁 무렵에는 아내와 함께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는 뿌리보다 넝쿨이 더 무성하다. 이랑을 건너 저들끼리 서로 얽히고설켰다. 이웃하고 있는 호박 넝쿨과도 엉기었다. 그 넝쿨들을 혼자 걷어내기가 버겁다고 했다. 넝쿨들을 모두 걷어 내고. 이랑을 조금씩 파들어 갔다. 크고 작은 것들이 빨간 얼굴을 내밀었다. 아내는 하나하나 캐낼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손주들의 재롱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두 이랑을 캐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

아내는 요즈음 많이 바쁘다. 새로 심은 열무며 배추도 돌보아야 하고, 고추도 따야 하고, 가지 골도 손봐야 하고, 정구지도 베어 다듬어야 하고, 틈을 내어 산에 밤도 주우러 가야 한다.

그 모든 일들은 아내의 몫이다. 나는 아내가 도와 달라고 할 때나 도와 줄 뿐이다. 아내는 내가 들일하는 재간을 그리 믿지도 않을 뿐더러, 혼자서 일하기를 좋아한다. 답답할 때도, 우울할 때도, 몸에 맥이 빠지는 듯할 때도 찾아가는 곳이 밭이란다. 밭에 가서 푸성귀를 만지고 흙을 주무르노라면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기도 솟아나는 것 같다고 한다.

한촌으로 옮겨 살기로 하면서 조그만 집을 지을 때, 나는 마당에 꽃도 가꾸고 나무도 심어 정원을 아담하게 꾸미자고 했지만, 아내는 단연코 텃밭을 만들자고 했다. 아내의 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 봄에 옮겨와서 날이 풀리자말자 아내는 일을 시작했다. 상추도 심고, 정구지도 가꾸고, 고추 모종도 넣고, 아내가 좋아하는 목화씨도 묻었다.

여름이 들자 조그만 텃밭이 푸른 초원으로 변해 갔다. 아내는 그 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집 부근 누구네 조그만 산밭이 손이 딸려 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인에게 청을 넣어 얻어냈다. 별로 크지도 않은 밭에 고추며, 가지며, 콩이며, 수수며, 호박이며, 감자며, 당근이며, 고구마를 총총 심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사람이 없다. 아침때가 되어서야 돌아온 아내는 손이며 발이 온통 흙투성이다. 툴툴 털고는 아침을 차린다. 설거지도 미루어 놓고 다시 마당 텃밭으로 나간다. 물을 주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고, 잠시도 쉬지 않는 것 같다.

나에게 도움을 청해 올 때는 땅을 갈아엎어야 하거나 이랑을 지울 때, 간혹 리어카를 끌고 산으로 가서 흙을 파와 밭에 더 채워 넣을 때처럼 조금 큰 힘을 들여야 할 때다. 그 때도 나 혼자 하게 버려두지 않는다. 자기와 함께 해야 직성이 풀린다. 흙을 고르고, 씨앗을 넣고 무엇을 심는 일은 모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기의 몫이다. 혼자 있을 때 그렇게 일을 하다보면 끼니도 거르기 일쑤란다.

아내에게 물었다. 무슨 재미로 밭에만 앉으면 모든 걸 잊어버리느냐고, 심지어는 끼니마저도 잊어가면서 일에 빠지느냐고? 아내가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말 잘 듣는 것이 어딨어요? 흙은 내가 어떻게 주무르고, 어딜 갖다 놓아도 고분고분하지, 저것들은 또 어때? 어디에 심어도, 어떤 곳에 꽂아도 아무 소리 않지, 그리고 내가 손보는 대로 크잖아요. 잘 대해 주면 잘 자라고, 좀 무심타 싶으면 시들하고, 바로 드러나더라고요.

아내의 말은 이어졌다. 당신이 그리 고분고분할까, 자식인들 그렇게 말을 잘 들어줄까, 어떤 이웃인들 그리 살가울까? 그러니 내가 어찌 안 빠지겠소? 이러다간 살림살이가 안 되겠다 싶어 밭에 좀 덜 나가려 해도, 날 기다리는 그것들 생각하면 몸에 좀이 쳐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흙에, 푸성귀에 온몸 온 마음을 걸었구나. 실은 아내의 그런 마음을 여태 영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낌새를 알아채기는 했다. 함께 살다 보면 말이 잘 안 통할 때도 있고, 뜻이 맞지 않을 때도 있고, 그래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고-. 자식도 부모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왜 없었을까. 그 때마다 답답한 곳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이 그립지 않았으랴.

다행이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아낸들 그런 답답한 일이 더는 없으리라고 어찌 믿을 수 있을 것이며, 난들 그런 마음을 다시는 트게 하지 않으리라 어찌 말할 수 있으랴. 아직도 숱하게 남은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또 어떤 애태움이 없을까. 아내의 그런 갑갑한 마음을 받아주고 풀어줄 곳이 있는 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모두 다행하다.

아내의 텃밭이 고맙다. 한촌으로 옮겨오기 전에는 종종 몸 어디가 좋지 않다, 어느 곳이 쑤시고 저리다 하며 이따금 응급실행도 마다 않더니. 한촌으로 옮겨오고부터는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아플 겨를도 없는 모양이다. 텃밭에 저렇게 매달리는데 다른 데 정신을 팔 틈이나 있을까. 오늘도 식전에 밭에 갔다 오더니, 아침 먹고는 이웃들과 밤 주우러 간단다.

아내는 또 바쁘다. 기력이 쇠해 보이는 막실할아버지네에 삶아 자시라고 드려야겠다며 튼실한 고구마 몇 개를 들고 나간다. 상자를 펼쳐 놓고는 호박 한 덩이에 고구마 몇 개, 고추 조금, 가지 몇 낱, 주워온 밤 두어 줌, 고루 섞어 담아 싼다. 서울 아이들에게도 보내주고, 대구 언니네에도 부쳐주려 한단다.

포장한 상자를 싣고 우체국을 향해 아내가 숨 가쁘게 달려간다.

호미를 던져놓고 간 마당 텃밭에는 배추가 푸른 하늘을 향해 잎을 넓적이 벌리고 있었다.(201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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