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승윤이의 선물

이청산 2013. 9. 29. 13:05

승윤이의 선물

 

승윤이는 초등학교 1학년짜리 내 손녀다.

추석이라고 아비, 어미, 아우와 함께 시골의 할아비, 할미를 찾아왔다. 학동이 된 탓일까. 제법 의젓해졌다. 주말에 가끔씩 와서 놀다 가곤하지만, 배우고 듣보는 것이 달라 그런가, 올 때마다 조금씩 더 커 보인다.

다소곳이 절을 하고는, “할아버지 할머니 잘 계셨습니까?”, “오냐! 그래, 너도 잘 있다가 왔느냐?” 서로 안부를 묻다가, 문득 멜가방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어 수줍은 듯 내민다.

할아버지, 할머니 선물이에요.”

봉투에는 문경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승윤 올림이라 적고. 5천 원을 넣어 놓았다. 승윤이에게 우리는 문경 할아버지, 할머니요, 홀로 계신 제 외할머니는 분당할머니다.

웬 선물이야?!” 갑작스런 선물에 놀라워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드리려는 거였구나!”하고 제 어미가 웃으며 말한다.

며칠 전에 꼬깃꼬깃 모아놓은 용돈을 제 어미에 내놓더니 5천 원짜리 두 장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더란다. 무엇에 쓸 거냐고 물으니 비밀이라고 하면서-. 이제 보니 한 장은 할아버지, 할머니께 드리고, 한 장은 분당할머니께 드릴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승윤이한테 받아보는 첫 선물이네, 하하하

승윤이도 웃고 모두 함께 웃었다. 명절을 맞아 처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께 무언가 선물을 하나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만큼 승윤이가 자란 모양이다. 어떤 선물을 어떻게 해드릴까, 골똘히 궁리하다가 가끔씩 용돈 봉투를 할아버지, 할머니께 드리는 제 아비, 어미의 모습을 생각해 내고는 저도 그렇게 드리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까워서 어떻게 쓰지? 두고두고 보기만 해야겠다. 하하하제 할미가 크게 웃었다.

제 딴은 할아비, 할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귀하고도 큰 선물이다. 값지고도 커다란 저의 마음을 그 봉투에 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봉투 속의 율곡 선생도 빙그레 귀애하는 미소를 짓고 계실 것 같았다.

제 어린 아우와 어울려 한참 귀염을 부리다가 한자로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한자를 쓸 줄 아느냐고 물으니, 배우고 싶다고 했다.

, 이건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는 선물이다.”

한자로 제 이름을 적은 봉투에 얼마간의 용돈을 넣어 주었다.

이게 네 이름을 한자로 쓴 거야, 같이 써볼까?”

고맙습니다. 열심히 써볼게요.”

백지에다가 제 이름을 다시 적어 오를 승, 윤택할 윤자야.’ 하면서 훈과 음이며 필순을 가르쳐 주고 써보게 했다. 제법 잘 써나갔다. 어찌 이리 잘 쓰느냐고 하니, 학습지로 기초 한자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기특하고도 대견했다. 제 어미에게 공부를 너무 강요한 것 아니냐?’ 하니, 제가 배우고 싶어 하더라고 했다. 제 이름을 한 장 다 쓰는 것을 보고, 다섯 살 터울의 제 아우 이름도 적어주니 그것도 또박 또박 열심히 써나갔다.

승윤이와 자전거를 함께 타고 달렸다. 뒤에 앉은 승윤이는 즐거운 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르는가 했더니, 오를 승, 윤택할 윤, 이을 승, 옥돌 민……, 이름자의 훈과 음을 외우고 있었다. 제 아비, 어미의 이름자의 훈과 음도 가르쳐 주었더니, 그것도 노래를 부르듯 따라 했다. 길섶에 줄지어 붉게 핀 샐비어가 함께 달리는 할아비와 손주의 모습이 부러운 듯 손짓을 했다.

꽃이 참 고와요!”

참 붉지? 샐비어라는 꽃이야!”

건너 길섶의 코스모스도 샘이 난 듯 긴 목을 빼면서 몸을 흔들었다.

승윤이가 서너 살 적에 할아비, 할미를 찾아와 놀다가 제 집으로 돌아갈 때, 헤어지기 싫다며 엉아!’하고 울음보를 터뜨리던 생각이 났다.

승윤아, 여기서 할아버지, 할머니랑 살까?”

아빠, 엄마랑 자주 올게요.”

자주 오겠다는 말이 여간 천연스럽지 않다.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향한다. 서녘 하늘이 승윤이의 볼처럼 고운 물이 들고 있다.

승윤이가 주던 봉투만이 선물이 아니었다. 승윤이랑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도 귀하고도 값진 선물이었다.(201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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