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사랑 이웃

이청산 2013. 9. 18. 20:27

사랑 이웃

 

마당 둥근 탁자에 안 씨를 비롯하여 이웃 몇 사람이 둘러앉았다. 아내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솥에서 돼지고기를 건져내어 썰었다. 술을 따라 함께 잔을 들었다.

이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안 씨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린 안 씨 덕분에 잘 먹네, 하하하이 씨가 말했다.

안 씨의 이웃 정리에 작은 보답이라도 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 몇 이웃을 함께 부른 것이다.

한촌에 터전을 잡아 산 지 삼 년을 넘어서고 있다. 한 생애를 마감하고 새로운 생애를 시작하면서 거처하던 도회지의 집을 버려두고, 자연의 청정한 풍치를 찾아 산이 있고 강이 있는 한촌에 조그만 집을 지어 옮겨 왔다. 평생의 소원으로 빌던 일이었다.

사택을 전전하던 지난 생애의 살림살이를 한촌으로 그대로 옮겨와 소박한 살림을 차렸다. 도회지의 집에 남아있는 것 중에서 필요한 것은 수시로 가져다 쓰곤 했지만, 불편하고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래도 맑고 좋은 물이며 바람이 그 모자람들을 잘 씻어 주었다.

어느 날 세탁기가 덜컥 고장이 나버렸다. 사택 살림살이 때 누구에게 얻어 쓰던 아주 오래된 것이다. 더 이상은 사용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웬만한 것은 참고 견디는 데에 이력이 나 있지만, 아내는 세탁기가 없이는 못 살 것 같다고 한다.

오래 되긴 했지만 별로 쓰지 않은 세탁기가 마침 도회지의 집에 하나 있었다. 그 걸 가져다 쓸 궁리를 해 보았지만 가져올 방법이 마땅찮았다. 승용차에 실을 수도 없고, 용달차를 부르려니 운임이 만만치 않아 조금만 더 보태보면 새것을 사는 게 나을 지경이다.

그런 사정을 이웃들과 함께 이야기를 했더니, 달려가서 실어 오겠다며 선뜻 나서는 이웃이 있었다. 안 씨였다. 그는 농사용으로 쓰는 트럭을 가지고 있었다.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안 씨와 함께 길을 달렸다. 두 시간 가까이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를 달려 도회지의 집으로 갔다. 먼지 앉은 세탁기를 안 씨와 함께 들어내었다. 그의 트럭에 실었다. 길을 되짚어 달려 다시 한촌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차에서 세탁기를 내려 집 안으로 들이는 데까지 안 씨는 마치 자기 일처럼 힘과 마음을 다 쏟았다.

이 고마움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 이것저것 쳐서 얼마간의 운임을 주었지만, 이웃 간에 그러는 게 아니라며 한사코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다. 한참을 씨름하고서야 연료비에도 못 미칠 작은 정성을 그에게 억지로 쥐어 주었지만, 우리보다 안 씨가 더 송구해 했다.

아무리 이웃 간의 정리로 하는 일이라지만, 그것으로 끝내고 말기에는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아내가 몇 이웃과 함께 안 씨를 불러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다.

다시 술잔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안 형 아니면 큰 힘이 들 뻔했습니다.”

다 그래 사는 기라요, 눈만 뜨면 보고 살면서 안 그러면 우째요!” 조 씨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랬다. 우리는 눈만 뜨면 보고 사는 사이였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산다.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누가 다녀갔고, 무슨 가재도구가 있는 것까지 다 알고 다 보면서 살고 있다. 서로를 다 알고 보고 살기에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 했던가. 어느 사촌 사인들 그리 가까울 수 있을까.

이웃에 없는 과일이나 곡식을 거두게 되면 갈라 먹을 일부터 먼저 생각한다. 스스로 농사지은 것만이 아니다. 장에 가서 무얼 좀 사와도 이웃과 나눌 일을 생각한다. 그런 이웃일지라도 지내다 보면 때로는 언짢은 일을 겪을 때도 없지 않다. 마치 부부간에도 다툼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한촌 사람들은 그 언짢음을 마음에 두고 새기는 법이 없다. 날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은 한결같다. ‘밤 잔 원수 없다는 속담 그대로다.

술이 거나해져 간다. 담소 화락, 이야기꽃이 활짝 피어난다. 누구네 나락이 잘 되었다는 둥, 누구네 과수원에 과일이 충실하다 둥, 콩밭에 칠 약이 모자라면 자기 것을 가져다 치라는 둥-. 그 잘 된 농사들이 마치 자기네 것들인 양 좋아들 한다.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는 정담들을 나누고 있을 때 동녘 하늘에서 상현달이 빙그레 떠올랐다. 좀처럼 지지 않던 이야기꽃이 달빛 속으로 조금씩 잦아들어 갔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라도 이야기해요, 그래야 이웃이지…….”

그렇다마다!”

모두들 덕담 한 마디씩 남기고 일어서는 자리에 별빛이 내려앉았다.

한촌은 산이며 물이며 자연의 풍치만 맑고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그 속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맑고 아름다운 곳이다.

한촌은 이웃 사랑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랑 이웃이 어울려 살고 있는 곳이다.(201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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