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샐비어

이청산 2013. 9. 1. 03:40

샐비어

 

샐비어 붉게 핀 강둑 자전거 길을 달린다. 푸르고 맑게 흐르는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이 꽃빛을 더욱 짙게 한다. 자전거 바퀴 안으로 샐비어의 손길이 감겨든다. 그 붉은 삶이 감겨든다.

어제 천지 모든 것을 짓이길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한바탕 내리치던 우레비가 작달비 되어 퍼붓더니, 오늘은 선선한 바람이 자전거를 달려 나가는 앙가슴으로 스며든다.

벌써 색바람이 부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제 그토록 몰아치던 천둥이며 우레비는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하늘의 엄숙한 통과제의였단 말인가.

지난여름은 무던히도 무더웠다. 세상을 온통 불사를 듯한 폭염이 연일을 두고 이어졌다. 마을은 염천에 눌려 죽은 듯이 고요했다. 오직 살아있는 것이라곤 매미소리 뿐, 그 소리마저도 절규처럼 비명처럼 들려오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염천의 더위가 오히려 제 세상인 듯 불볕 태양의 열기를 마음껏 흡입하며 홍염으로 붉디붉게 타오르는 것이 있었다. 강둑 길섶의 샐비어였다. 아름다운 길 가꾸기로 심어진 것이었지만, 샐비어는 행인들의 정어린 눈길과 더불어 제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갔다.

봄이며 여름 들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대궁을 키워오던 샐비어는 날이 뜨거워지면서 붉은 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붉은 빛을 다 모은 듯한, 더는 붉어질 수가 없을 듯한 진홍으로 타오르며 끓는 여름 한철을 온전히 불태웠다.

한껏 열정을 다해 타오르는 그 꽃잎 위에 어느 날 문득 소염의 잿빛이 한두 점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 빛 내려앉을 줄 알아 그리 뜨거운 열정을 짙붉게 토해냈던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샐비어 꽃처럼

타오를 수 있을 때까지 타올라라

살아있으니까 불타는 것이다

……

누구에게나

불탈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김주완, ‘불길

 

그랬다. 살아있으니까 불타는 것이었다. 샐비어는 살아있었다. 그의 꽃말처럼 정열을 다해 살아있었다. 불타는 마음으로 살아있었다. 폭염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폭염의 그 빛은 삶의 유용한 쏘시개였다.

샐비어는 불탈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았다. 머잖아 거두어야 할 불길임을 알고 있었다. 곧 색바람, 갈바람이 불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생이 비록 길지 않을지라도 그 짧은 생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열렬히 타오르는 불길로 그 원망을 녹여냈다. 이제 샐비어는 조용히 그 불길의 재를 남기고 있다. 후회 없는 연소였다.

자전거를 달려 나간다. 삶의 시간 속을 달려 나간다. 농익은 태양 빛을 받으며 얼마 남지 않은 빛을 미련 없이 태우고 있는 샐비어가 바퀴 속으로, 시간 속으로 감겨든다. 그 잿빛이 곱다. 태울 것을 다 태운 뒤의 잘 정제된 은은한 빛깔이다.

페달을 밟는다. 한 발 한 발 내 삶을 밟아나가듯 페달을 밟아나간다. 샐비어가 흘러가고, 길이 흘러간다. 내 삶의 길이 흘러가고, 불타고 있는 샐비어가 흘러간다.

, 나는 언제 삶을 그렇게 불태워 보았던가.

나의 불탈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2013.8.25.)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이웃  (0) 2013.09.18
매미  (0) 2013.09.07
행복하다  (0) 2013.08.18
오르고 달린다  (0) 2013.08.10
시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  (0) 2013.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