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행복하다

이청산 2013. 8. 18. 13:59

행복하다

 

산을 오른다. 해거름이면 늘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새롭다. 나뭇잎의 빛깔이 새롭고, 바람에 일렁이는 가지의 모습이 새롭고, 가랑잎 밟는 소리가 새롭다. 나무들 사이로 피어나는 꽃들이 철마다 날마다 새롭고, 나무들 사이를 날며 혹은 나뭇가지에 앉아 우짖는 새소리가 들을 때마다 새롭다. 산을 오를 때면 언제나 그 새로움을 보고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숲 속을 걷는다. 바깥세상은 폭염이 천지를 휘덮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모든 것들이 숨을 죽이고 있을지라도, 오직 살아있는 소리 하나 매미 소리마저 비명을 지르는 듯할지라도, 그러나 숲 속은 시원하다. 잎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이 시원하고, 잎들 사이로 지나다니는 바람이 시원하다. 염천의 시원한 그늘이 행복하다.

새들이 우짖는다. 이곳저곳에서 갖가지 소리가 들려온다. 높낮이와 맑고 밝기가 다 다른 소리들이 섞이고 어울리어 울려오는 것이 명지휘자의 지휘를 받으며 화음 맞추어 합창을 하는 듯하다. 어느 작곡가가 맑고도 고운 이 화음을 그려낼 수 있을까. 새소리 청량한 합창을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숲속이 행복하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밖을 나서면 머리도 지근대고 눈도 침침하다. 이 때 산을 올라 숲 속에 들면 머리와 눈이 씻은 듯 청랑해진다. 푸른 잎의 덕택인가, 명랑한 바람의 효용인가. 맑은 머리, 밝은 눈으로 걸을 수 있는 숲길이 행복하다.

맑아진 머리로 숲길을 걷노라면 아름다운 시를 외거나 내 수필 한 구절을 외고 싶어진다.

시 하나 왼다.

……,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조병화, ‘, 혹은’)

시를 외며 산길을 걸으면 가슴에 맑고 따뜻한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는 것 같다. 그리운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아침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설레게 내게로 오고 있다. 시를 외고 싶게 하고 그리운 이를 그리게 하는 숲길이 고맙고 행복하다.

나의 수필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이를 먹어 가는 일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늘어나는 일이라 했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난 것도 둥글게 보일 수 있고, 날카로운 것도 부드럽게 보일 수 있고, 내게로 오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도 안다고 했다.……”(졸고, ‘생일 풍경’)

진정 모난 것이 둥글게 보이자면, 날카로운 것이 부드럽게 보이자면, 내게로 오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도 알자면 마음의 눈을 맑고 곱게 닦고 닦아 높은 수양을 얻어야 할 일이겠지만, 숲 속을 걷다보면 그 순간만이라도 마음의 눈이 샘물처럼 맑아지는 것 같다. 내게로 오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음의 눈을 맑혀주는 숲길이 행복하다.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시를 외고 글의 구절들을 상기하며 숲을 걷고 산을 오르는 사이에 어느덧 봉우리에 이른다.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저 평화-. 크고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그 산자락 아래 군데군데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들이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아기 얼굴처럼 평화롭다. 저 푸른 들판들은 또 얼마나 넉넉하고 싱그러운 평화인가. 산봉우리에 서면 평화의 풍경이 있어 아늑히 행복하다.

마을 집집을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희로애락이야 왜 없을까만, 그래도 그 집들은 대문도 없이 산다. 서로 나누어 쓰고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나물 철엔 나물을 나누고, 과실이 나면 과실을 나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서로 나누며 산다는 것이-.

산바람이 불어온다. 이 바람에 무슨 유해 기류가 있고, 무슨 애증 세속이 있을 것인가. 아무런 티도 때도 묻지 않은 오직 원시의 그 바람일 뿐이다. 그 처녀림 같은 바람으로 땀을 씻을 수 있어 행복하다.

산길을 내려 걷는다. 잎새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내게 말을 거는가 보다. 그래 알아요. 우린 서로 좋아하고 있잖아요, 사랑하고 있잖아요, 그 사랑 찾아 이렇게 당신의 가슴 속을 걷고 있잖아요. 주고받는 이 사랑의 고백에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뱀이 스르르 지나간다. 고라니가 후드득 뛰어간다. 저 잽싸게 달아나는 건 토끼인가. 천천히 조용히 가도 돼요. 나도 이렇게 한가히 걷고 있는 걸. 산이 좋아 이렇게 산을 걷는 걸. 저들과 같이 걸을 수 있는 산길이 있어 행복하다.

마을로 내려온다. 집에 든다. 마당 텃밭의 옥수수가 넓은 잎을 활짝 벌려 반갑게 맞는다. 고추가 잎 속에 묻힌 채 얼굴을 빨갛게 붉힌다. 아내가 정구지(부추)를 벤다. 전을 좀 부치겠단다. 그러면 막걸리 한 잔 안 할 수 있나. 고추도 몇 개 따고, 옆집도 좀 부르고-. 정구지전에 된장 찍은 고추로 이웃과 더불어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산이 있고. 숲정이가 있고, 새소리가 있고, 원시의 바람이 있는 한촌이 행복하다.

그 삶이 행복하다. 막걸리 한 잔이 행복하다.(2013.8.16.)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미  (0) 2013.09.07
샐비어  (0) 2013.09.01
오르고 달린다  (0) 2013.08.10
시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  (0) 2013.07.28
그리운 능소화  (0) 2013.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