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그리운 능소화

이청산 2013. 7. 7. 21:05

그리운 능소화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피어나고, 뜨거운 햇살이 온갖 것들 위로 제 자리인 양 내려앉았다.

대문간의 능소화가 그리도 오랫동안 다물고 있던 봉오리를 드디어 터뜨리기 시작했다.

다른 집 것은 다들 활짝 피어나는데, 삭혀야 할 것이 무에 그리 많았던지 우리 집 것만 피어날 줄 몰랐다. 무엇 때문일까? 오월부터 뻗어 오르기 시작한 넝쿨 끝에 종종 봉오리가 맺히고, 봉오리는 점점 여물어가는 듯했지만, 꽉 다문 채로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 집 건 왜 안 필까? 이상하네!” “까닭이 있지요.” 아내가 말했다. “무슨 까닭……?!” 아내만 아는 무슨 까닭이 있단 말인가.

내가 능소화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입때껏 살아오면서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능소화가 받고 있는 것 같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피지 말라, 피지 말라! 했지요. 이 무슨 오뉴월 서리 같은 원한(?)인가.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충남의 어느 초등학교 여교사가 했던 실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국화 화분 두 개를 구입하여 한 화분에는 넌 참 예뻐’, 한 화분에는 넌 미워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 물주기, 햇빛이며 바람 쐬기 등은 똑같이 해주면서 화분을 보고 적힌 대로 말해 주었는데, 열흘 정도 경과하자 두 꽃의 자태가 눈에 띄게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넌 참 예뻐화분은 꽃이 잘 피는데 넌 미워화분은 꽃망울이 맺지도 못하면서 말라 버리더라고 했다.

말이 지닌 뜻과 느낌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물에도 옮겨져서 생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의 힘에 관한 실험이었다. 그렇다면 아내의 그 시샘(?) 때문에 꽃이 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내가 놀라는 것을 보고 아내가 재미난 듯 웃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을 보고 함께 미소를 지었지만 가슴에는 잠시 서늘한 기운이 스쳐갔다.

우리 집 능소화가 다른 집보다 더디 피었던 것은 옮겨 심은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까닭인 것 같았다. 내가 한촌 살이를 시작하던 재작년 봄에 심었으니 뿌리가 그다지 깊게 내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반갑게 피어났다. 그리운 개화였다. 붉은빛과 노란빛이 절묘하게 섞인 빛깔이 고우면서도 눈부시지 않고, 아리따우면서도 천박해 보이지 않는 그 기품이 생각났다. 꽃자루 끝에 단아하게 꽃을 달고 바람결을 따라 정중동으로 미동하는 줄기의 점잖은 모습이 보고 싶었다. 화려하거나 현란하지 않으면서 은은하고도 고상한 향기를 지니고 있는 자태가 그리웠다.

문득 한 구절 시가 떠오른다.

 

,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 혹은 때때로/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조병화, ‘늘 혹은’)

 

꽃은 내가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대로 피어났다. 그 기품이며 모습과 그 자태가 해가 바뀐들 달라질 것은 아니련만, 그리던 대로 피어준 것이 그리운 이와의 꿈속 해후마냥 설레게 반가웠다. 능소화는 그렇게 내 그리움 속에서 피어났다.

전설 속의 능소화는 그리움을 받는 꽃이 아니라, 애타게 그리움을 바쳤던 꽃이었다. 고운 자태와 은은한 아리따움으로 임금님의 사랑을 받아 빈()이 된 소화궁녀는 애틋한 사랑의 순간을 못 잊어 임금님을 기다리고 기다리지만, 다른 비빈의 시샘을 이겨내지 못해 애타는 그리움을 안은 채 하염없이 담 너머만 바라다가 애처롭게 죽어가야 했다. 소화 궁녀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우아하고 고상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죽어서 꽃이 된 소화 궁녀는 밤 깊은 어둠 속에서도 곱고 환한 기품으로 피어나 사람들은 그 꽃을 능소화(凌宵花)’라 불렀다.

능소화가 피었다. 그리움의 등불을 켜 들고 전설처럼 곱고도 환하게 피어났다. 그 고상한 기품이며, 은은한 아름다움 때문일까. 그리움은 그리움을 낳기 때문일까. 그리움을 위하여 생애를 바쳤던 꽃이 그리움으로 생애를 사는 사람의 꽃이 되기도 한다.

대문간 담 너머로 우아한 화관을 내밀고 있는 능소화-. 고우면서도 눈부시지 않고, 은은하고도 우아한 향기를 지닌 능소화 같은 사람이 그립다. 곧장 가슴 한가득 그리움을 안고 달려 올 것 같은 능소화, 그 사람이 그립다.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능소화가 피면 생각나는 사람-. 그리운 사람-.(20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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