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시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

이청산 2013. 7. 28. 11:40

詩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

 

콘서트가 끝났다. 출연자들은 무대에 모두 올라 손을 잡고 객석을 향하여 절을 한다. 관객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파도치던 갈채의 기억을 남겨두고 일어섰다. 낭송의 열기가 가득 차 있던 무대에서 기념촬영으로 북적대던 관객들과 회원들도 모두 홀을 빠져 나갔다. 그들 모두 시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에 젖다가 갔을까. 꿈을 안고 갔을까.

이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온 봄과 이 여름을 살았다. 두 달마다 한 번씩 만나 가지는 낭송모임에서 공연의 얼개를 짜고, 무대가 펼쳐질 7월을 상상하며 시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을 주제로 정했다. 아름다운 시로 한여름 밤의 낭만을 새겨보자 했다. 낭송예술의 승화를 통해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보자며 뜻과 마음을 모은 지 이태만의 결행이었다.

5월 모임 이후부터 개인 낭송, 퍼포먼스, 합송, 시극 팀으로 나누어 연습에 돌입했다. 언제나 그래 왔지만, 낭송과 무대 경력이 풍부한 회장님이 지도와 총연출을 맡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습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공연에 이르기까지 각 팀 별로 십여 회가 넘는 연습 시간을 가지는데, 모든 팀을 다 살펴야 하는 회장님은 시차를 두고 하루에도 몇 차례 이어지는 팀별 지도를 위해 일쑤 끼니도 잊고 뛰어다녀야 했다.

나는 자작 수필 낭독을 하기로 했다. 생일을 맞는 감회를 이야기한 수필이다. 낭독이라고 해서 보고 읽기만 할 수 있으랴, 읽기에만 메어서는 표정도 감정도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았다. 발음과 억양, 감정 등을 회장님에게 조언을 받으며 외우기를 애썼다. 아침 산책길에도 외우고, 저녁 등산길에서도 외웠다. 감정을 잘 살리는 일에도 마음을 모았다.

다른 팀들도 저마다의 그림을 그려 나갔다. 퍼포먼스 팀은 그리움을 주제로 하되 재미있는 행위로 관객을 흥미롭게 할 것, 합송 팀은 가족 사랑을 주제로 하여 가족 구성원의 캐릭터 별로 낭송의 묘미를 살릴 것, 시극 팀은 몇 개의 시를 엮어 관객에게 드라마틱하게 전달할 것-. 더위도 땀을 흘리게 했지만, 완성도를 향해 치닫는 열기가 더욱 짙은 땀을 흐르게 했다.

공연을 일주일 앞둔 목요일 오후, 회원들은 공연장인 도서관 시청각실에 모두 모였다. 총연습을 위해서다. 순서대로 회장님의 여는 시부터 연습해 나갔다. 회장님의 목소리는 언제나 청아했다. 나는 진지하고 정감 있는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개인 낭송하는 회원들, 퍼포먼스 팀, 합송 팀, 시극 팀의 실연 못지않은 연습이 열띠게 진행되어 갔다. 조금은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회원들의 얼굴에 작은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공연 전 일주일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팀 별 연습이 진행되었다. 회원들은 그 몰입을 즐거워하고, 아우르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겼다.

드디어 무대의 날이 왔다. 7시 공연을 앞두고 2시부터 모였다. 두 번째의 총연습에 돌입했다. 음악에도 맞추고 조명도 받으면서 소품도 갖추어 실제의 무대 상황을 연출해 본다. 한 번의 일제 연습이 끝나도, 한 번만, 한 번만 더하겠다는 회원들의 성화에 회장님과 사회자의 즐거운 비명은 그칠 줄 모른다.

6시가 넘어가면서 관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초청한 인사들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회원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꽃과 방명록을 준비하고, 팸플릿과 음료수도 준비했다. 스태프도 저마다의 자리를 잡았다. 출연진이 곧 스태프다.나는 무대 배경 영상의 제작과 상영을 맡았다. 공연이 시작될 무렵 홀이 가득 찼다. 많은 공연 경험을 가진 회장님도 긴장이 된다고 했다.

 

 

75, 막이 잠시 닫혔다가 열리면서 25현 가야금 연주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대학생 연주자가 오프닝 사운드로 친숙한 민요 도라지를 연주했다. 객석이 조용해지면서 연주는 절정에 올랐다. 연주가 끝났을 때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쓸어안으며 사회자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와주신 관객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는 인사와 함께 아름다운 시로 한여름 밤의 꿈을 새겨 나가겠다며 멘트를 이어갔다. 고심도 하고,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날들이 바야흐로 무대 위로 펼쳐져 나갔다. 시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이 여울져 나갔다.

첫 무대, 해안을 밀려드는 파도 영상과 함께 회장님이 등장한다. “파도는, 오세영,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곱고도 낭랑한 목소리 속으로 파도가 밀리고 부서진다. 관객의 시선과 귀는 모두 무대로 모아진다. 나중에 어떤 이는, 하늘의 선녀 아니면 신화 속의 여신이 등장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의상의 분위기며 고아한 모습, 청아한 목소리가 그런 환상에 젖게 했다는 것이다. 낭송이 끝났을 때 객석에서 엄청난 박수 해일이 몰아쳐 왔다. 회장님의 아름답고도 환상적인 첫 무대는 회원들에게 용기가 되어 안겨왔다.

낭송을 마친 회장님은 내빈을 소개하고 인사말을 이어 나갔다. 두 해 전 우리 협회가 창립된 이래 줄곧 아름다운 시를 찾아 시랑이 있는 목소리로 낭랑히 읊어내기를 애써오면서, 그 결정을 모아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인사에 이르러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나의 수필 낭독 순서다. 목청을 가다듬고 무대로 나섰다. 조명을 받는 순간 눈앞이 모두 하얬다.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시선은 관객을 향하면서 정감 어린 목소리로 낭독이 아닌 낭송하기를 애썼다. 어느 관객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회장님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날아왔다. 관객들은 숨은 모두 죽인 채 시선을 모아 주었다. 낭송이 끝났을 때 함성과 박수의 물결이 장내를 덮었다. 현실 속에 발을 딛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의 콘서트를 축복하는 내빈 축사에 이어 무대는 계속 흘러갔다. 기대도 큰 퍼포먼스 순서다. 무대가 암전되었다가 서서히 밝아지면서 여 회원이 유연한 춤사위로 기다란 흰 천을 감고 두르며 등장하여 남 회원과 함께 그리움을 주제로 한 시를 주고받는다. 이어 장사익의 절창 님은 먼 곳에가 울려 퍼지는 동안 여 회원의 날렵한 춤사위가 클라이맥스에 오르고 배경이 바뀌면서 다시 시가 이어지는데, 아뿔싸, 남 회원이 그만 시를 잊었다. 출연자는 당황하고 관객은 민망해진다. 겨우 마무리하고 퇴장하는데, 무대를 나서서도 꺼지지 않은 헤드셋 마이크가 통 생각이 안 나더라.’는 남 회원의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관객의 실소가 터진다. 그것도 재미있는 퍼포먼스가 되었을까? 난감한 추억이 될까?

김 회원이 객석에서 시의 지은이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대 흐린 날 주막 같은 인연이 있는가라는 시를 애잔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읊어내고, 초대 낭송으로 울산의 최 낭송가가 화려한 매너로 황금찬의 ‘7월의 바다를 낭랑하고도 격정적으로 낭송하는 사이에 무대가 무르익어 갔다.

찬조 순서로 등장한 성악가의 김동진 곡 가고파연주에 이어 합송 순서가 되면서 콘서트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언제 그렇게 약속했을까? 옥빛 두루마기와 진자주 저고리, 남녀 다섯 회원이 모두 한복을 갖추어 입고 등장한다, 아내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자식으로 설정된 캐릭터에 의해 가족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이 각자의 역할에 따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릴레이로 이어진다. 관객들은 전율마저 느끼며 감동에 빠져 든다. 마지막으로 팔을 벌려 호소하는 동작을 할 때 박수소리는 장내를 폭발시킬 듯했다.

임 회원이 영원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문태준 시 백년을 낭송한다. 허스키로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애틋한 시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나가면서 객석은 다시 감동에 젖어간다.

대망의 마지막 순서 시극 시인이 되었어요가 펼쳐진다. 무대는 어느 술집, 식탁과 의자 툇마루가 소품으로 등장하고, 한지에 늘여 쓴 메뉴 글자가 펄럭인다. 술친구로 만난 두 시인이 대화를 나누면서 좋아하는 시며 자작시를 주고받는데, 시가 낭송될 때마다 박수가 터지고 대사에 따라 폭소가 폭발한다. 또 한 술꾼이 그 분위기를 타고 자기의 애송시를 구수한 목소리로 낭송하는데, 목소리와 제스처가 시를 더욱 맛깔지게 한다. 주모도 흥이 난 듯 창 한 가락 뽑겠다며 장구를 들고 나서 무대 중앙에 단정히 앉아 장구 가락에 얹어 구성진 목소리로 권주가를 부른다. 관객들의 긴장이 극에 이르는 찰나 창은 스타카토로 딱 멈춘다. 넋을 잃었던 관객이 황급히 제정신으로 돌아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배우들이 손을 잡고 서서 허리를 굽히자 객석에서는 다시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진다.

모든 회원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 관객을 향해 절을 한다.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그칠 줄 모르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시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꿈은 박수의 파도로 새기는 한여름 밤의 아름다움이 되어갔다. 출연자와 내빈들이 함께 어울려 기념 촬영을 한다. 이 감격적인 순간을 두고두고 새기고 싶다. 영원히 남겨 두고 싶다.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할까? 이젠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준비해왔던 것을 한 순간에 다 털어내어 버린 지금 가슴에 무엇을 담아야 하지? 그랬다. 우리에겐 관객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남았다. 그 화려한 기억이 감동으로 남았다. 하나로 마음 모아 연습하고 연마했던 아름다운 인정들이 풋풋하게 남았다. 아름다운 시들이 오롯하게 남았다. 오늘밤 모두 잠을 잘 못 잘 것 같다고 한다. 갑시다. 모두 갑시다. 뒤풀이 한판 걸쭉하게 해야지요-. 수고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그 수고와 고생이 무대를, 우리의 삶을 빛냈습니다. 찬란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손을 잡고 흔들 때, 한여름 밤하늘에서 맑고 또렷한 별빛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꿈이 되어, 시가 되어 내려앉고 있었다.(201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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