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죽도의 피아노 연주회

이청산 2013. 6. 11. 07:01

죽도의 피아노 연주회

 

울릉도 저동항에서 동북쪽으로 4쯤 떨어져 있는 작은 섬 죽도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연주회 소식이 어느 신문의 보도(2013,6,3 조선일보)를 타고 들려왔다. 관객은 이 섬의 유일한 주민 김유곤 씨 한 사람, 그리고 함께 죽도를 찾은 백 씨의 부인 영화배우 윤정희 씨.

문득 내 섬 살이의 기억이 또렷한 영상으로 새겨진다. 내가 죽도를 찾은 것은 울릉도에 삶의 터를 잡고 있을 당시인 이천팔 년 여름이었다. 육지로의 전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섬의 풍광들을 가슴에 담아 두고 싶어 휴일을 맞아 도동항에서 뱃길 20분을 달려 죽도로 갔다.

해무가 잔뜩 끼어 선착장에 닿아서야 섬의 모습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나선형의 364층계를 돌고 돌아 죽도에 올랐을 때는 주변 바다 풍경은 모두 안개 속에 묻히고 눈앞의 풍경만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하얀 집에 김 씨 부자가 살고 있는데, 어머니는 6년 전에 산나물을 캐다가 절벽에서 추락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날 아버지는 본섬(울릉도)으로 출타 중이었고 김 씨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아버지마저도 몇 년 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연주회 기사가 전하고 있다.

무인도가 되게 할 수 없다며 지금도 혼자 섬을 지키고 산다는 김 씨는, 내가 죽도를 찾았을 때 사십대 초반의 노총각이었다. 직접 생산하여 팔고 있는 더덕즙 한 잔을 청해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외로운 섬을 찾아준 사람이 반가운 듯 수박까지 대접하며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부모가 사십여 년 전 죽도에 들어와 딸 다섯, 아들 둘을 두고 농사짓고 소 먹이며, 관광객을 상대로 식당도 운영하며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딸들은 모두 육지로 시집을 가고, 작은아들은 공무원이 되어 본섬으로 나가고, 자기만 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더덕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지금은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산다고 했다.

널찍한 거실에 놓여 있는 컴퓨터와 피아노는 일하는 틈틈이 자기가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피아노는 본섬에서 홀로 자취하며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장만해 준 것이라며, 학업을 마치고 죽도로 돌아오면서 가져왔다고 한다. 전문적인 연주 실력은 닦지 못했지만 책에 있는 노래든, 없는 노래든 혼자 흥얼거리며 치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이 절해고도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 배도 아닌 바지선을 빌려 싣고 와서 선착장에 부려놓고 백 미터도 넘는 섬 위를 도르래로 끌어올려 집까지 운반하는데 적잖은 공력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공력을 들여서라도 피아노를 가져 오고 싶었던 것은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그의 필수품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울릉도를 떠나오고, 5년이 흘러갔다. 그 사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그는 여전히 노총각 신세로 농사를 지으며 오직 컴퓨터며 피아노를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래어 왔을 것이다.

그의 고적한 섬 살이 속으로 놀랍게도 저명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찾아왔다. 북한의 포탄이 쏟아진 이듬해 연평도를 시작으로 섬마을 콘서트를 이어오던 백 씨가 이번에는 울릉도를 찾아와 피아노를 좋아하는 단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죽도에서 콘서트를 열기로 한 것이다

백 씨가 김 씨에게 좋아하는 곡을 물으니, 그는 가끔씩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하면서 메기의 추억을 노래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곡을 듣고 싶다고 했다. 연주가는 다른 레퍼토리를 다 제쳐두고, 따라 부르기를 권하면서 그 곡을 연주했다. 어머니 생각에 잠기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김 씨의 눈자위에 이슬이 촉촉이 맺혀갔다.

그 모습을 본 연주가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 중에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멜로디의 2악장을 이어서 들려주었다. 김 씨는 백 씨가 연주하는 순간까지도 그가 그토록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줄 몰랐고, 피아노 연주가 이렇게 감동적일 줄도 미처 몰랐다며 감탄을 거듭했다.

연주에 감동한 김 씨는 백 씨에게 게를 우린 국물로 끓인 라면과 고추장을 듬뿍 바른 생더덕을 대접했다. 콘서트를 마친 백 씨 부부가 죽도를 떠날 때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울릉도로 돌아온 백 씨 부부가 전하는 이야기로 보도를 한 것을 보면 죽도에는 백 씨 부부만 간 것 같고, 김 씨를 옆에 앉혀 두고 등을 보이며 연주를 하고 있는 장면이며, 김 씨와 포옹하는 모습은 부인 윤정희 씨가 촬영한 것 같다. 남편의 특별한 연주회를 지켜보는 부인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죽도는 참 호젓한 곳이다. 연중 쾌청한 날이 몇 날 되지 않는 죽도, 그 섬을 드나드는 조그만 배는 파도가 조금만 일어도, 승객 수가 차지 않아도 결항하기 일쑤여서 몇 날 며칠을 두고 사람 구경을 못할 때가 많다.

그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서 열렸던 명연주가의 연주회는 김 씨에게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감동이요,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백 씨도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면, 내 마음도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쏠리게 된다."고 술회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도 매우 인상적인 연주회가 된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며 내가 글을 쓰는 일을 생각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진정으로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아주 즐겁게 그 한 사람을 위해 명문장을 남기려 애쓸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읽어 줄 사람이 있는 글을 쓰기 위한 애씀과 함께.

또한 명연주회의 감동의 힘이 어찌 관객 수에 있으랴. 김 씨에게 그 연주회의 기억은 고적한 삶을 용기와 희망의 삶으로 바꾸어줄 아름다운 에너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 얼마나 감동의 큰 힘인가. 글 또한 많은 독자의 수에만 감동이 있다 하랴.

지금도 그는 연주회의 감동을 되새기며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까. 내 삶의 외로움 속에서 나도 어느 명연주회의 단 한 사람의 관객이고 싶다. 그 감동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 감동 속을 살아가고 싶다. 그런 글의 독자가 되고, 필자가 되고 싶다.

죽도의 연주회 소식을 들으면서-. 쉼 없이 내게서 빠져 나가고 있는 삶의 날들을 보면서-.(20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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