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세월이 흐른 자리

이청산 2013. 6. 30. 15:34

세월이 흐른 자리

 

언제 움이 틀까 싶었던 뒷집 살구나무는 어느 새 무성해진 잎 속에 아기 주먹만 한 살구를 달고 있다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툭툭 떨어뜨리고 있다.

초봄에 사다 심은 감나무 묘목이 봄이 다 갈 무렵에야 겨우 촉을 내밀더니 지금은 제법 넓적한 잎사귀를 피우고 있다. 텃밭에 고추도 무럭무럭 자라 손가락 같은 고추를 줄줄이 달고 있다.

들판이 푸른 초원을 이루어가고 있다. 모내기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 모들이 쑥쑥 커 올라 논들이 나날이 푸름을 더해 간다.

한촌에서 세 번째 맞는 여름이다. 시간이 언제 그렇게 흘러갔던가.

한 생애를 아쉬움과 함께 물러나 제2막의 삶은 자연과 더불어 살리라 하고, 산이 푸르고 강이 흐르는 곳에 조그만 집을 지어 옮겨 산 지 엊그제 일 같기만 한데, 벌써 새 해째를 살고 있다. 그 세월이 흐른 자리 위에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세월 동안에 이 한촌이 점점 정든 곳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여러 곳에 삶의 터를 두어 왔으면서도 크게 정든 곳을 두고 살아오지 못한 것 같다. 직장을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그곳에 살 때에는 정 붙이고 살기를 애써 왔다. 그 산천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비치는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가슴에 담기도 애쓰고, 그 정경들을 놓칠세라 글로 새겨 두기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들 만하면 떠나야하고, 새로운 삶의 터를 가꾸어야 하기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아련한 기억만 쌓여갈 뿐, 시간이 흐를수록 정든 곳의 빛깔은 바래어 가는 것 같았다.

참 좋은 곳을 정하여 남은 생애를 정착, 안착시키리라 하고, 찾고 구하기를 거듭하여 찾아온 곳이 이 한촌이다. 정이 들어가고 있다. 정 둘만한 곳이 되어 가고 있다.

아침마다 정겨운 소리와 함께 맑게 흐르는 물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강둑이 있고, 저녁 무렵이면 새소리 바람소리로 온몸을 감싸며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는 곳, 언제나 열려 있는 문으로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다녀가고 다녀올 수 있는 이웃들이 있는 곳-.

아내가 새카만 얼굴로 고추며, 가지며, 콩이며, 들깨가 날 봐 달라는 듯이 달려드는 것이 여간 귀엽지 않다며 하나하나 풀을 뽑는 텃밭이 있는 곳, 그 풀 중에 먹을 만한 것을 골라 푹 삶아 고추장 넣고 조물조물 무쳐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곳-.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그리 말했다던가. “장소는 인간 실존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킨다.”.

철학자가 한 말의 어려운 철학적 의미는 어찌 되었던지 간에, 지금 내 삶의 장소인 이 한촌은 내 삶이 자연 그리고 이웃과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도록 해주는 곳임에 틀림없고, 삶을 자유롭게 하고, 삶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물론 틀림없다고 헤아리고.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은 지금의 내 생각이고 판단이다. 앞으로 내 삶의 모습은 또 어떻게 변해 갈지 나는 모른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바뀌어지지 않는 것이란 없지 않은가.

나의 다른 글에서도 새긴 적이 있는 말이지만, 가버린 것은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은 기약하지 못하니, 지금 눈앞의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한 다산 선생의 말씀을 다시 뇌어보고 싶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한촌의 정경이며 인정이야말로 나에겐 참으로 커다란 즐거움이다. 다만,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도 지금의 이 모습이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희로애락을 싸안으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까닭은 오늘 이 세월의 뒷자리를 얻기 위해서였던지도 모르겠다. 내 지난 생애 속에서는 늘 자연과 더불어 마음의 자유를 구가하며 살 수 있는 공간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 이제 그 공간에 이른 것이다. 나에게 남은 일이란, 비로소 얻은 그 그리움의 공간을 잘 지켜 나가는 일이겠다. 잘 가꾸어나가는 일이겠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창 안 깊숙이로 스민다. 술을 잘 담그는 옆집 성씨가 술 잘 익었다며 같이 한 잔 하잔다. 이웃에서 감자를 캤다며 자주감자 한 소쿠리 들고 왔다. 아내는 오는 장날에 고등어라도 두어 손 사다가 나누어 먹어야겠다고 한다.

주말을 맞아 아이들이 아비, 어미를 찾아온다고 한다. 아내는 힘 들여 뭐 하러 오느냐?’하면서도 엊그제 생일이 지나간 아들을 위해 미역과 고기를 사놓았다. 어린것에게 무엇을 해줄까, 궁리하며 텃밭의 부추를 베어 정갈하게 다듬는다. 한촌의 노부모는 이렇게 아이들을 기다리는 재미로도 산다.

세월이 흐른 자리에서-. 그리웠던 공간에서-. (201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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