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오월이 남긴 것들

이청산 2013. 6. 1. 09:44

오월이 남긴 것들

 

드디어 마당의 어린 감나무에서 촉이 텄다. 오월도 하순을 넘어설 무렵이었다. 다른 집 큰 감나무에서는 벌써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잎들이 벌었는데, 초봄에 사다 심은 감나무에서는 싹이 틀 기미를 영 보이지 않았다.

마당에 같이 서 있는 앵두나무, 매실나무며 목련, 라일락 들은 벌써 꽃이 피었다 지고 지금은 잎도 무성한데, 감나무는 좀처럼 눈을 내밀지 못했다. 제대로 된 것이 아닌 걸 심은 건가, 잘못 심고 가꾼 건가. 그러나 오월은 그것의 촉을 기어이 터지게 했다. 자리를 옮겨와 촉을 틔워내기가 참 힘들었던 모양이다.

대문간 문설주 옆의 능소화 마른 줄기도 새뜻하게 돋아나온 새 줄기와 함께 새파란 잎을 피워냈다. 뜨거운 햇살을 받아 품고 한여름 밤을 우아하게 밝혀줄 기품 있는 꽃을 피울 날도 멀지 않았다.

재작년 봄에 함께 심은 대추나무는 올해도 잎을 잘 피워냈는데, 석류나무는 모든 생명들이 무성해지는 오월을 보내면서도 끝내 싹을 틔워내지 못했다. 작년 봄엔 잎을 좀 피워냈었는데, 몹시도 추웠던 지난겨울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석류나무가 추위에 약하다는 걸 진작 몰랐던 게 탈이었다.

마당 텃밭이 제법 어울렸다. 지난 가을에 심은 몇 이랑 마늘이 홰기도 잘 뻗어 통이 곧 지상으로 나오려 하고 있고, 고추 모종들이 제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다. 감자는 얼마나 달리려는지 잎이 한껏 무성해지면서 꽃도 피어났다. 흰 감자엔 흰 꽃이 핀다고 했던가.

경운기며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던 들판이 조용해져갔다. 문 씨네 논을 마지막으로 동네 모내기도 다 끝났다. 연초록 어린모들이 씨금 날금 줄 맞추며 들판의 모든 논을 채웠다. 문 씨는 이앙기를 직접 몰아 정성 들여 모를 심었지만, 모내기를 하기까지 마음고생이 참 많았다.

남보다 손 빠르게 모판 앉힌 못자리에 모가 솔솔 잘 자라는가 싶더니, 이 게 웬일인가. 어떤 것은 자라도 너무 잘 자라 쑥쑥 못자리를 덮어간다. 모두 쭉정이가 될 키다리병이라고도 하는 웃자람병에 걸린 것들이다. 심어 보기도 전에 한 해 농사를 망칠 판이라 모판에 붙어 앉아 뽑아내어 보기도 하고, 상담소 사람도 불러보았지만 소용없고 하릴없는 일이었다.

낙심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못 쓸 것은 모두 엎어버리기로 했다. 동네 몇 집이며 이웃 동네까지 수소문하여 심고 남은 모 중에 쓸 만한 것들을 거두어들였다. 그 모로 오늘 비로소 모내기를 마친 것이다. 총총히 꽂힌 모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문 씨의 온몸에서는 진득한 땀방울이 흥건히 배어나왔다.

모가 다 심어진 들판에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 사람의 마음 같은 평화로 덮여지는가 싶더니, 밤에는 개구리의 합창 소리가 점점 크고 장해져 갔다. 저 게 무슨 합창단이라고 한다면 날이 갈수록 단원 수를 점점 불려가는 형세다. 날로 싱그러움을 더해가는 오월은 개구리의 웅장한 합창곡이 밤도 풋풋한 싱그러움에 젖게 했다.

엊그제는 종일을 두고 비가 내려 산천이며 들판의 생기를 한층 더해주더니, 오늘 아침은 금방 헹구어낸 옥양목 같은 눈부신 햇살이 내리고 있다. 문득 어디선가 골짝을 메아리지우며 들려오는 소리, ‘뻐꾹 뻑뻐꾹 뻐꾹-’ 올봄 들어 처음 듣는 소리다. 철을 잊지 않고 뻐꾸기가 찾아왔다. 그리운 옛 친구의 목소리마냥 반가운 소리로 날아왔다.

그 소리는 정겨운 시를 싣고서 고샅으로 내려온다. “너는 언제나 희망이었고 사랑이었지/ 언제나 그리움이었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 지금도 나는 네 소리를 들을 수 있지/ 들판에 누워 귀를 기울이면/ 저 황금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나니……” (워즈워스, ‘뻐꾸기에게’)

문득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희망일까. 사랑일까. 보이지 않는 모습에 대한 그리움일까.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오월에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피천득, ‘오월’)

오월은 차가운 겨울을 건너오지 못한 석류나무의 안타까움을 보듬으며, 어린 감나무에게 촉을 남기고 가고 있다. 앵두나무, 매실나무, 대추나무에게 열매를 기약케 하고 라일락 그리운 향기 속으로 들고 있다.

담 너머로 오월의 푸른 잎을 내밀고 있는 대문간의 능소화는, 이제 동구 밖을 바라며 임 그리는 단아한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문 씨의 굵은 땀방울을 논들에 묻게 한 오월은 희망과 사랑이 자라고 열매 맺는 푸른 초원의 계절을 향하여 달음질쳐 나아갈 것이다.

오월이 남긴 것들을 품으면서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다. 뻐꾸기 노래 소리와 더불어 황금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고 있다. (201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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