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오월의 한촌 길

이청산 2013. 5. 12. 11:39

오월의 한촌 길

 

아침 한촌 길을 걷는다. 논두렁을 지나 마을 숲에 들어 나무가 빚어내는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벚나무 늘어선 강둑길을 따라 걷다가 들길로 든다. 날마다 아침이면 거니는 길이지만, 오월 아침의 한촌 길은 걸을 때마다 풍경이 새롭다.

사월의 현란했던 꽃들은 전설처럼 아득해졌지만, 오월이 들면서 푸른빛을 띠어 가기 시작하던 풍경들은 아침마다 날마다 명도와 채도를 바꾸어 가며 새로워지고 있다. 어느 화가가 풍경 속에 들어앉아 유려한 붓질로 옅고 짙기를 바꾸어 그려내고 있는가.

마을 숲의 느티나무, 회나무 노거수며. 강둑의 꽃 진 벚나무들이 은은한 연두색의 움을 내미는가 싶더니 움이 싹이 되고 잎으로 피어나면서 연초록으로, 진초록으로 점점 더 짙은 빛깔을 칠해 가고 있다.

마을 숲이며 강둑의 나무들뿐이랴, 강둑의 벚꽃이 다 질 때까지도 온갖 산꽃들로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던 들판 건너 산봉우리들도 다투어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다. 아침나절이 다르고, 저녁나절이 다르다.

날이 갈수록 농도를 더해만 가는 저 푸름의 끝은 어디일까. 저렇게 푸르다가는 세상의 모든 풍경들을, 그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온통 푸름의 깊은 바다 속으로 함몰시켜 버릴 것만 같다.

강둑을 걷는다. 맑은 햇살을 안고 흐르기 때문일까. 오월의 강물은 유난히 맑다. 물소리도 싱그럽다. 가을 강물소리가 중년 여인의 청랑하고 세련된 목소리 같다면, 오월의 물소리는 열여덟 살 소녀가 낭랑히 시를 외는 목소리 같다고 할까.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조병화, ‘늘 혹은’). 문득 내가 물소리의 소녀라도 된 듯, 어느 시인의 시가 나도 모르게 후두를 타고 올라온다. 저 초록빛 물소리며, 물결 위에 얹힌 맑은 햇살을 듣고 보면서 걷노라면, 오월의 아침에는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흰 새 한 마리가 강물 위를 난다.

강둑을 내려와 들길로 든다. 요란히 들려오는 기계 소리-. 언뜻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이 크게 뜨인다. 눈길이 소리를 쫓아간다. 아랫마을 김 씨가 들 가운데에서 엊그제 갈아놓은 논을 트랙터로 써레질하고 있다. 트랙터는 흙덩이를 부드럽게 부수어가면서 논바닥을 평평히 고른다. 핸들을 잡는 손길이 분주하다. 저 논에 곧 물이 차고 푸른빛을 담아갈 것이다.

건너편 밭에서는 검은 비닐이 덮인 긴 고랑에 앉은 사람들이 두런두런 바쁜 손을 놀리고 있다. 어린 사과 묘목을 꽂아 나간다. 작년 봄에도 묘목 재배로 재미를 봤다는 건용 씨가 올해는 남의 땅까지 얻어 재배지를 늘렸단다. 곧 돋아나올 묘목의 푸른 잎을 따라 건용 씨의 마음도 푸른빛을 채워갈 것이다.

들길을 걷는 내 걸음 따라 들머리 산자락의 푸른빛이 손을 맞는 여인네처럼 빛깔을 다시 가다듬는다. 오천댁이 논들 못자리로 든다. 모판에 덮인 비닐을 걷는다. 모가 알맞게 자라면 벗겨서 햇빛을 보게 해야 한다며 비닐을 걷는데, 병아리 솜털 같은 어린모들이 뾰족이 고개를 내민다. ‘수고하신다!’며 인사를 건네니, 햇살 같은 웃음으로 손 흔들며 안녕을 묻는다.

저 나무들이며 산의 푸름이 들판으로 내려올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며칠 후면 저 모들은 이앙기를 타고 하나 하나 논바닥에 꽂히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 머리카락 같이 모가 꽂힌 들판은 날로 짙어져 가는 푸름을 타고 넓은 초원을 펼쳐나가게 될 것이다.

오월은 나날이 푸름을 더해가고 있다. 생기가 넘쳐나고 있다. 생명들이 푸름을 품고 꿈틀거리고 있다. 저 나무도 산자락도 푸름에 젖어가고, 들판에 분주한 손길을 심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도 날로 풋풋한 푸름을 더해가고 있다.

점점 푸러져 가는 산자락 숲정이를 바라보며, 강둑을 거닐고 들길을 걷는 사이에 내 몸에도 푸른 물이 시나브로 깊숙이 젖어오고 있는 것 같다. 얼굴에도 가슴에도 발자국에도 푸른 물이 배어들고 있는 것 같다. 누가 내 나이를 물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피천득, ‘오월’)라고 했다던가. 그래, 나는 오월 싱그러운 청춘의 한 복판을 걷고 있다. 푸른 걸음을 걷는다.

무언가 좋은 일이 찾아올 것만 같은 오월의 아침, 정다운 이로부터 너무 그립다는 푸른 문자라도 날아올까. 집 마당에 들어서니 뜰 앞에 화사하게 핀 라일락 짙은 향기가 살갑게 품을 파고든다.

푸른 오월의 아침에-.(201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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