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들판의 오월

이청산 2013. 5. 26. 21:02

들판의 오월

 

들판에 기계 소리가 가득하다. 이 씨가 논을 삶는 경운기 소리다. 남 일 시켜 놓고 삯 주고 놀

고 있으면 뭐하느냐며, 트랙터에 논 삶기를 맡기지 않고 경운기로 직접 삶는다. 힘은 좀 들어도 내 일 내가 하는 것이 좋은 일 아니냐 한다.

경운기와 함께 한나절을 물이 절벅한 논바닥을 휘젓던 이 씨는 점심 무렵 세 마지기 논을 다 삶고 논들을 나오며 봇도랑 물에 장화를 씻는다. 이제 다 삶았으니 곧 모내기를 해야 할 것이라 한다.

올해 모내기는 회관 옆의 피 씨네 논으로부터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피 씨는 부부 함께 부지런히 모를 날라다가 이앙기에 싣고, 피 씨의 핸들을 따라 이앙기의 플로트는 재바르게 모를 꽂아나갔다. 모내기철이 시작되었지만, 작년보다는 좀 늦었다고 한다. 봄날이 봄날 같지 않은 때가 많아 모의 생육이 느려졌다는 것이다. 아직 쓰레질을 하지 않는 논도 있고, 이제 물을 대어 삶는 논도 있다.

문씨와 김씨네는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모판에 모가 잘 자라는가 싶더니, 다른 것 보다 쑥쑥 웃자라는 모들이 많이 나타났다. 다른 모보다 키는 두 배 정도 크면서도 잎이 좁고 잎 끝이 벌써 누렇게 말라버리는 키다리병에 걸린 것이란다. 이런 걸 그대로 심으면 다른 것도 잘 못 자라게 할 뿐만 아니라 쭉정이만 달려 벼농사를 망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종자에 문제가 있는 걸까, 비료에 문제가 있는 걸까. 기술센터 김 소장이라도 불러봐야겠다며 문씨댁은 한숨을 쉰다. 김씨네 할매는 이른 아침부터 모판에 앉아 그 키다리들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 많은 걸 어찌 다 뽑으려느냐고 하니, “안 그라면 우째여! 우째 보고만 있노?” 하면서 잠시도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집 마당의 육묘상에서 모를 키우고 있던 조씨는 어제 모를 내다 심었다. 다른 집 모보다는 키다리가 많지 않아 다행이라며 대여섯 마지기 논을 다 심었다. 모심느라고 한 달에 한 번씩 놀러 가는 모임에도 못 나갔다. 이 철에 놀러가 다 무엇인가.

이앙기로 심고 난 다음에도 한참 손질을 해야 한다. 누운 모는 세우고, 덜 심긴 곳은 더 눌러주거나 보태어 심어야 한다. 그 일을 한 나절이나 했다.

최 씨 내외가 연뿌리를 캐고 있다. 연근 수입이 괜찮다고 하여 재작년에 논을 갈아 종근을 심었다. 쑥쑥 잘 자라 희고 붉은 연꽃을 피울 때는 참 보기가 좋았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꽃 구경을 했다. 한 해를 넘긴 작년 봄에 뿌리를 수확하려고 보니 영 덜 여물었다. 한 해를 더 두면 충실해질 것이라 하고 해를 넘겼다. 지금 캐고 있다. 크긴 좀 컸는데, 물을 잘 못 댄 건가, 썩은 게 많다. 소출이 얼마나 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이다.

아내가 텃밭에 고구마 줄기를 심고 있다. 무릎과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세 이랑째를 심는다. 엊그제 심어놓은 고추가 제법 컸다. 아내가 하는 일이야 힘은 들지언정, 가꾸는 것이 좋고 세월을 묻어나가는 것이 좋아 하는 일이지만, 농군의 일이야 어디 그런가.

고샅에 경운기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침에 논을 삶던 이씨가 부인을 태우고 뒷골 과수원에 적과하러 가고 있다. 잠시도 쉴 겨를이 없다. 나무 밑에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 꽃을 솎아낸다. 과실이 될 것 안 될 것을 골라 꽃을 한참 따다 보면 어깨도 팔도 몹시 아프다.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발이 통통 붓기도 한다. 골짝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들을 겨를이 없다.

요란한 기계소리가 적막을 깨우는 들판의 오월은 참 바쁘다. 논에 물을 대어 삶아야 하고, 모를 손질해야 하고, 모를 내다 심어야 하고, 과일나무를 손질해야 하고, 약도 쳐야 하고……. 아직도 김씨네 할매는 모판에서 키다리를 뽑아내고 있다. 저게 바로 농심이던가,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는 키다리를 뽑아내고 있다. 뽑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할매의 애간장을 품고, 들판의 애환을 안고 오월이 가고 있다.

들판의 오월은 요란한 경운기 소리다. 삶이 호흡하는 소리다. 농군의 분주한 손길이다. 그 땀이다. 논들의 봇물이다. 생명의 물이다. 오월은-.

그렇게 오월이 가고 있다. 그렇게 삶이 솟음치고 있다. (201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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