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촌에서 혼자 집보기

이청산 2013. 1. 11. 18:18

한촌에서 혼자 집보기

 

한 생애를 마감하고 제2막의 삶을 찾아 한촌으로 옮겨온 지도 만 이태가 되어 갑니다. 제가 사는 한촌은 조그만 동네지만 아침에 해가 뜨면 제일 먼저 따스한 볕살이 내려앉는 곳입니다.

이 한촌에서 혼자 집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등쌀대거나 성가시게 하는 일이라도 있느냐고요? 그렇진 않지만 이웃들이 그냥 가만 놔두지를 않습니다.

아내가 모처럼 손녀도 볼 겸해서 한 일주일 서울 딸네 집 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을 생각하여 국을 두 가지나 끓여놓고, 반찬도 넉넉하게 장만해 놓고 갔습니다. 아내가 없으면 좀 불편은 하겠지만, 해방된 민족(?)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즐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떠난 이튿날부터 자유롭고 한가하게만 지낼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회관에서는 점심나절이 되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함께 모둠밥을 해 먹곤 합니다. 점심때가 되자 회관에 모인 사람들이 혼자서 뭐하느냐며 점심을 먹으러 나오라고 야단입니다. 생각해 주는 마음들을 뿌리칠 수 없어 회관에 가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누가 가져온 꽃게로 끓인 국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왔는데, 혼자 있는 동안 매일 나오라고 합니다.

점심을 먹고 집에 오니 현관문 앞에 비닐봉지가 두 개가 놓여있었습니다. 하나는 누가 멸치를 볶아 한 통을 갖다 놓았고, 또 하나에는 두유 몇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멸치는 옆집에서 갖다 놓았을 것 같다고 하고, 두유는 이튿날 길에서 만난 건넛집 할아버지가 자식들이 가져 온 것을 갈라먹고 싶어 갖다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다음날도 회관에 가서 점심을 먹고 집에 와 책을 좀 읽고 있다가, 해질 무렵 저녁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누가 삶은 닭 한 마리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걸 갖다놓은 이웃은 아내가 집에 없는 줄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 걸 제가 혼자 어찌 다 먹으란 말입니까?

오늘도 회관에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나서는데 또 누가 북어국 한 냄비와 고추집장 한 사발을 갖다 놓았더군요. 아직도 따끈한 걸 보니 끓여서 곧 가져온 것 같습니다.

물론 저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고, 먹을거리가 부실하지 않을까 싶어 마음 써주는 이웃들의 정성이지요. 나중에는 다 알 일이지만, 굳이 알리려고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갖다 놓습니다. 제가 미안해 할 걸 짐작해서 그렇게들 하는 것이겠지요. 사소한 것까지도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웃들입니다.

그 정성들이야 더없이 고마운 것이지만, 좀 난감하고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촌에서 혼자 집 보기란 그렇게 쉬운 일도, 해방스러운(?)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고마움들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요. 아내가 돌아오면 떡이라도 좀 빚어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도 서로들 그렇게 나누며 살아가지요. 나물 철에는 나물을 나누고, 과일 철에는 과일을 나누고, 객지 식구들이 무어라도 보내오면 그것도 서로 나누며 살아가지요. 그래서 회관에는 맛있는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며칠 사이에 눈이 많이 내려 지금도 산이며 들이 온통 눈 천지입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매우 차갑습니다. 그러나 마을회관은 참 따스합니다. 서로 나누며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회관을 따뜻하게 만들고, 그 마음들이 또 온 마을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뜨면 우리 마을엔 따뜻한 볕살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저의 제2막 생애 위에도 내려앉을 볕살입니다.(20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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