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회관의 모둠밥

이청산 2013. 1. 30. 15:18

회관의 모둠밥

 

여럿이 먹으이까 얼매나 맛있노!”

하마, 이레 먹으마 반찬이 뭐 필요하노?”

점심때가 되면 마을회관에서는 동네사람들이 모여 모둠밥을 짓는다. 밥을 짓는 사람들은 주로 좀 젊은 할매들이지만, 먹을 때는 동네사람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와서 함께 먹는다. 남녀노소라고 해야 거의가 육칠십 대의 노친네들이다. 동네사람이 아닐지라도 때맞추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앉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내가 손녀도 볼 겸 딸네 집을 다니러 가느라고 며칠 집을 비웠다. 회관에서 감자탕 맛있게 끓여 놓았다고 점심을 먹으러 나오라는 전갈이 왔다. 궁상맞게 혼자 차려먹지 말고 꼭 나오란다.

회관에 나가니 할매들이 반겨 맞으며 큼직한 뼈다귀를 담은 사발을 안긴다. 혼자 있는 동안에는 사양 말고 매일 나오란다. 이 씨, 최 씨, 김 씨 들이며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소주도 한 잔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감자탕은 먼갓할매의 아들이 가져온 돼지등뼈로 고았단다. 두어 시간 걸쭉하게 고아 감자며, , 당면을 넣고 다시 끓였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을 불러 둘러앉아 함께 먹으며, 참 맛있다고, 혼자 집에서 이런 걸 어찌 해먹을 수 있겠느냐고, 먼갓할매한테 치사를 모은다.

내 혼자 먹으마 뭔 맛이 있겠노! 이레 먹는 기 나도 참 좋제!”

일찍이 혼자되어 키운 자식들을 객지에 다 내보낸 먼갓할매는 은근히 자식이 자랑스럽다.

엊그제는 남해에 사는 하내할매 사위가 싱싱한 굴을 한 상자 보내왔다. 동네사람들과 함께 반찬 삼아 안주 삼아 생것으로도 먹고 구워도 먹으면서, 고마운 사위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늘 혼자 지내는 하내할매 얼굴에서 오랜만에 웃음이 번져났다.

먼갓할매며 하내할매뿐만 아니라 동네에는 혼자 사는 할매들이 많다. 나날을 홀로 적적히 지내다 보니 점심 한 끼라도 어울려 같이 먹는 것이 그리 즐거울 수가 없다.

가끔씩 어느 기관에서 쌀 포를 가져오기도 하고, 누구는 동태 한 상자, 콩나물 한 시루를 사오기도 하고, 과일 상자를 들고 오기도 하지만, 간장이며 된장, 채소며 나물, 고기며 생선 등 집집이 있는 대로 조금씩 가져오는 걸로 먹을거리를 주로 장만한다. 집에 있는 걸 들고 오기도 하지만 객지 식구들이 보내온 것을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집 대처 자제들은 회관으로 바로 무얼 부쳐오기도 한다. 김치는 김장철에 회관에 함께 담가 둔 걸로 같이 먹는다. 이래저래 회관에는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이 먹을 것을 제가끔 가져와서 벌이는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회관에서 함께 먹는 점심은, 초대 받은 사람은 으레 무엇을 가져와야 하고, 한 번의 성찬으로 끝나고 마는 포트럭 파티는 아니다.

누가 무얼 가져오면 좋고, 못 가져와도 상관없다. 왜 안 가져오느냐고 하는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 무엇을 가져오라거나, 가져오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다. 먹을거리를 모으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모으고 인정을 나누는 것이다. 회관의 점심은 일손이 조금 한가해지는 늦가을부터 겨울을 날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어느 날은 보리밥을 짓기도 하고, 국수를 삶기도 하고, 묵나물을 덖기도 하고, 동태국을 끓이기도 한다. 여러 집 것이 모이다 보니 별미 별찬도 있고 다채롭고 풍성한 상이 차려지기도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은 비지탕에 김치 하나로 둘러앉기도 하고, 양념장 얹은 국수 한 그릇으로 때우기도 하지만, 함께 모여 앉는 것이 즐겁고, 때를 같이 하는 것이 더욱 즐겁다.

회관의 모둠밥에는 버릴 게 전혀 없다. 도시 사람들이 처치 곤란해 하는 음식 쓰레기도 없다. 국물 찌꺼기든, 고기 뼈다귀든, 과일 껍질이든 짐승들의 먹이로 아주 유용하다. 짐승 먹이는 집에서 다 싸가지고 간다. 남기는 음식도 없다. 먹고 남는 밥이며 찬이 있으면, 혼자 사는 할매들의 저녁거리며 아침거리로 다 나눈다. 처치할 잔물이 없어 설거지도 그리 성가시지 않다.

밥하고 반찬 장만은 할매들이 울력으로 다 하는 터라, 그냥 먹기만 하기가 미안한 남정네들이 설거지라도 좀 거들라치면, 치울 것도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남정네들은 부엌 출입을 하는 게 아니라는 습속도 이곳에선 미덕이 되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는 둘러앉아 놀이판을 벌이는가 하면, 웃음 섞인 이야기판도 벌어진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며, 좋고 궂은일들이 이 판들에서 다 녹아난다. 한참 판을 벌이다 보면 모든 것이 즐거운 일이 되고, 만사가 다 호사가 된다.

어느 곳 날씨는 영하 십 몇 도로 내려가고, 어느 고장엔 폭설이 길을 된통 막아버렸다지만, 밖에는 설한풍이 불고, 모든 것들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한촌 마을회관에는 따뜻한 방바닥의 열기보다 더 따스한 가슴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그 열기를 서로 나누고 있을 뿐이다.

큰 사발에 담은 밥그릇 하나로 둘러앉은 회관의 모둠밥엔 겨울이 없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인정의 온기서린 김만 있을 뿐이다. 감미롭고 따사로운 맛만 있을 뿐이다.

겨울이 참 따뜻하게 깊어가고 있다.(201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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