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20년 전

이청산 2012. 12. 6. 14:43

20년 전

 

선생님. 20년 전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으셨던 의흥중 2학년1반 김희영입니다. 20년 만에 선생님 찾게 되네요. 이제야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어제 같은 시간이 20년이나 될 줄 몰랐어요. 이 반가움을, 이 긴 세월을 다 적기엔…….”

20년 전의 시간들이 내게로 찾아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카페의 어느 글에 형민맘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내 글에 무척 공감이 간다는 댓글을 달아놓았길래 감사하다는 답글을 붙였더니, 20년 전의 제자 김희영이라고 자신을 밝히면서 그 시절이 눈물 나게 그립다며 더 늦기 전에 한번 찾아뵙겠다고 했다.

흘러간 세월속의 아련한 기억들이 굴뚝을 오르는 저녁연기처럼 아스라이 피어올랐다.

교직을 시작한 이래 20년 가까이를 고등학교 아이들만 가르쳐오다가 처음으로 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한 학년이 겨우 두 학급인 조그만 학교였는데, 2학년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이 막 피어나는 꽃들같이 귀엽고 예뻤다. 입시지도에, 생활지도에 늘 긴장만 하면서 살아왔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한결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과 재미나게 지내고 싶었다.

수업 시간에 틈틈이 시를 읽어 주었는데, 첫 시간에 김춘수의 을 들려주면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자고 했다. 그게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던 걸까. 지금은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직장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미숙이가 불현 듯 내 카페를 찾아왔다. 뜻밖의 반가움이었다.

미숙이도 희영이와 같은 그 때의 제자였다. 자기가 듣고 있는 어떤 강의에서 받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과제의 해결을 궁리하다가 내가 들려주었던 이라는 시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내 글 속에 인용된 그 시를 보고 내 카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며 가까이 사는 친구들과 한번 찾아뵙겠다고 했다. 마침 시댁이 내가 살고 있는 문경이라 했다. 기억의 켜 위에 얹힌 먼지들을 조용히 쓸어내 보니 미숙이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보일 듯도 했다.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다며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자 했다.

희영이는 미숙이로부터 내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희영이는 중년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며 학급신문을 만들어 돌려보고, 학급 생일기념회도 했던 일을 추억해냈다. 수업 시간에 내가 했던 농담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중요한 출제 관계로 한 달쯤 아이들을 떠나기도 했었는데, 그 때 아이들은 선생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희영이가 틔워 주는 옛 시간의 길을 따라 나도 20년의 묵은 시간 여행길을 나서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학급신문을 내었다. 신문이래야 큰 시험지 한 장에다가 아이들 글도 싣고, 학급 소식도 서로 나누고 하는 것이었지만, 아이들이 참 재미있어 했었다. 은자가 주로 맡아서 쓰고 그리면서 편집했던가. 아이들 생일이 되면 조그만 선물을 하나 마련해 주고 함께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곤 했었다. “햇빛처럼 찬란한……하고 내가 지어준 가사로 노래를 불렀던 것 같은데, 나도 지금 그 가사를 잊어버렸다.

국어책에 나온 희곡으로 직접 연극을 꾸며도 보고, 교내합창대회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희영이는 여태 간직하고 있던 그 때의 장면들을 나에게 보내왔다. 희영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모습이 한번 보고 싶다 했더니, 자기 모습이며, 아들 둘 딸 둘의 다복한 아이들 모습도 함께 보냈다. 지금의 모습을 보니 옛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고 했더니, 졸업앨범 속의 사진을 다시 보내주었다. 그래, 이 모습이야! 정갈한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였다. 기억이 맑게 씻은 유리잔같이 떠올랐다.

희영이는 공부를 열심히 한 기억은 나지 않고 다른 것들만 생각난다고 했지만, 내 기억으로는 말없이 공부며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단발머리 소녀가 어느새 네 아이 어머니가 되는 세월이 흘러갔다. 아이들을 다 잘 키우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 덩실한 모습이다. 아이들을 많이 낳기를 권하는 요즈음 시대에 나라를 위해서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며 칭찬해 주었다.

학급 친구들 모두 함께 찍은 앨범사진도 보내왔다. 나는 그 때 이 아이들과 한 해를 함께 생활하다가 벽지를 찾아간다고 다른 학교로 옮겨갔다. 졸업앨범 속에는 다른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있었지만, 아이들은 모두 어제 본 듯 설지 않은 얼굴들이다. 이름은 세월의 두께에 가려 가물가물했지만 그 모습들은 세월의 켜를 뚫고 나와 선연히 살아 있었다. 그리움이 명치끝에서 파란 연기가 되어 아릿하게 피어오르는 듯했다.

이 아이들하고 교지를 만든다고 몇 날 며칠 머리를 맞대면서 궁리를 했었지. 그래서 학교 역사 처음으로 학교 뒷산 이름을 딴 책을 만들어 냈지. 그리고 교목 이름을 따서 느티전시회라는 것도 만들어 시화며 그림이며 공작품 전시도 하고……. , 그 때 규헌이는 참 장난꾸러기였어. 교복에 단추가 성할 날이 없었잖아. 그래도 심성은 참 좋은 아이였지.

20년 전의 일을 회억하는 사이에 나의 몸도 마음도 그 시절 속을 깊숙이 유영하고 있었다. 지난 일이기 때문에 그리 생각되는 걸까. 그 때는 힘든 것도 어려운 것도 별로 몰랐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면 마냥 즐겁게 하고 싶어 했었다. 모든 일이 어찌 그리 뜻대로만 되어갔을까마는, 그래서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20년이 흘렀다. 미숙이, 희영이가 모두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중년을 넘어서고 있고, 나도 한 생애를 마감하고, 새로운 생애를 시작한 지도 이태를 넘어가고 있다. 사람이 세월을 흐르게 하는 것일까. 세월이 사람을 흐르게 하는 것일까. 그 흐름 속에서 타버린 장작불 속의 발간 잉걸처럼 남아준 기억들이 고맙다. 사람은 다가올 날의 밝은 빛을 바라며 살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애틋한 지난날의 추억이 있어 삶의 자양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희영아, 미숙아 고맙다. 너희들에게서 내 적요한 삶의 따뜻한 자양 하나를 얻었구나. 언제 한번 보자구나. (20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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