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눈길을 거닐며

이청산 2012. 12. 14. 13:55

눈길을 거닐며

 

눈이 많이도 내렸다. 산에도 들판에도 강둑에도 집들 위에도 모두가 눈이다. 순백의 고요한 세상이다. 눈 덮인 풍경을 두고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고은, ‘눈길’)라 한 시구가 눈앞에 그림이 되어 펼쳐져 있다. 대지의 숨결마저도 멎어버린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얀 묵상에 깊이 잠겨 있는 듯하다. 하얀 평화가 온 세상을 싸안고 있는 듯하다.

여느 때처럼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마을을 지나 논두렁길을 거쳐 노거수들이 버티고 선 마을 숲에 들었다가 강둑길을 한참 걸어 들판을 가로 질러 집으로 오는 길이다. 오늘은 마을길도 논두렁길도 들길도 없다. 길은 오직 하나, 눈길뿐이다.

고샅 삽짝 앞은 저마다 길을 터놓았지만 들길은 밤새 내린 하늘 눈 그대로다. 눈을 밟으며 걷는다. 아무도 발자국을 새기지 않은 원시의 신천지를 걷는다. 천지에 일찍이 없었던 발자국을 내가 제일 먼저 설레게 찍는다. 이 새하얀 천지에 둔중한 발자국을 새기기가 무슨 허물이라도 짓는 듯 송구하다.

발목을 잡는 눈 속을 걸어 논두렁을 지나 순백의 설원 위에 느티나무 회나무 노거수가 서 있는 마을 숲으로 간다. 세상의 모든 번뇌를 초월한 듯이 서있는 나무의 자태가 더없이 고고하다. 속진은 다 떨치고 오직 하늘 우러러 서 있는 품이 모든 것을 초탈하고 우화한 선인 같다. 모든 희로애락을 눈 속에 묻어두고 있는 동리 인가며 속진 다 털고 고고히 서 있는 노거수, 선과 속이 모두 한 빛이 되어 한 풍경 속에 어우러져 있다.

벚나무가 줄지어선 강둑에 오른다. 강물은 적설에 안겨 더욱 청아한 소리로 흐르고 물가의 갈대숲은 한바탕 꽃 잔치를 벌이고 있다. 하얀 꽃송이가 무덕무덕 맑은 햇살을 이고 한껏 반짝인다. 꽃은 강가에서만이 아니라 강둑에서도 눈부시다. 저 벚나무들은 철마다 꽃을 피운다. 봄에는 연분홍 꽃 이파리가 그리 휘황하게 날리더니, 여름에는 푸른 잎으로 강물마저 푸른 물로 흐르게 하다가, 물색 고운 단풍이 들어 눈길을 설레게 하던 가을날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가지마다 송이송이 순백의 은화를 피우고 있다. 저 황홀한 꽃 함께 가슴에 담고 싶은 마음에 그리운 사람을 더욱 그립게 하고 있다.

강둑 하얀 길을 한참 걷다가 문득 끊임없이 나를 따라온 걸음을 돌아본다. 바르게 이어져 온 줄만 알았던 발자국의 행렬이 굽어지고 이지러져 있다. 저렇듯 이지러지며 오늘 내가 걸어온 것은 저 찬란한 은화에 눈이 부셨던 탓이었을까. 내 살아온 길은 또 어떠했을까. 오늘 눈길이 저 걸음 보여주지 않았다면, 어지러운 자취 흘리며 지나온 삶에 차마 무심할 뻔했구나.

강둑을 내려 들길로 든다. 순백의 설원-. 달리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다. 저 하얀 것 아래 무엇이 묻혀 있을지언정 오늘만은 세상 모두 평화롭다. 천지는 모두 순정하다. 모든 것을 자애롭게 덮고 있는 저 하얀 것은 따뜻하다. 저 따뜻한 것 위에 내리는 햇살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빛이다. 맑은 빛일 수밖에 없는 잘 헹구어진 빛이다.

그 순정하고 따뜻한 살결 위에 어찌 거친 발자국을 찍을까. 생채기를 지우는 것 같아 내딛기가 조심스럽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던진 내 걸음 내 말 한 마디가 누구에게 무엇에게 적지 않은 생채기를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취를 남긴 줄도 모른 채 살아온 지난날들이 새삼스레 돌아 보인다. 이 설원에서-.

저 앞에 산은 또 무엇인가. 잘 바랜 옥양목으로 온통 감싸놓은 듯한 등성이 위에 나무들이 씻은 모습을 하고 섰다. 얼기설기 얽혀있던 수풀이며 켜켜이 쌓인 낙엽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떨어져 마른 잎들이며 어지럽게 엉긴 수풀들이 새로 닦인 세상 안에 다 들었다. 하얀 새 세상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한결 새뜻하다.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 덮어버리고 새 출발한 청년들의 모습 같다.

들판의 순정이며 산등성이의 새뜻한 모습에 취하여 걷다 보니 문득 마을에 이른다. 눈길은 눈길로 이어진다. 고샅을 나와 동구 밖으로 나가는 길에 나란히 찍혀 있는 크고 작은 두 행렬의 발자국, 누가 저리 짝을 지어 걸었을까. 부부가 걸었을까, 모자가 걸었을까. 손을 잡고 걸었을까, 무슨 얘기 나누며 걸었을까.

눈길을 힘들게 밟고 차부로 나가 객지로 떠나가는 아들을 보내고 돌아오며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돌아가고 있구나!”(이청준, ‘눈길’)며 애끓는 목소리를 토해내던 노모의 모습이 얼핏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란히 걸어간두 발자국이 너무도 따뜻해 보인다. 노부부 다정히 읍내 장으로 가던 걸음일지, 혹은 읍내 의원을 찾아 함께 가던 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으며 눈길을 걸어 집으로 드니 눈 쌓인 마당 한 귀퉁이에 걸린 양은솥에 아내가 불을 지피고 있다

늙은 호박을 고아 범벅을 쑤고 있다. 구수한 맛에 고소한 맛이 더하라고 팥도 흠뻑 넣었다 한다. 하얀 눈빛에 어울려 불잉걸 빛이 더욱 붉다.

설원이 있고 눈길이 있는 한촌이 좋다. 눈길을 걸을 수 있는 한촌이 정겹다. 무엇을 재미삼아 이 한촌을 사느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소로(H.D.Thoreau)의 말을 빌릴 수밖에 없다.

계절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할 일은 충분하지 않겠소?”(201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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