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눈 속에서 맞는 새해

이청산 2013. 1. 4. 15:50

눈 속에서 맞는 새해

 

새해 새 날 첫 아침, 한두 점 흩날리기 시작하던 눈이 날이 밝아오면서 송이가 점점 크고 많아지더니, 마침내는 함박눈이 되어 산야를 휘덮어가고 있었다.

밝아오는 새해를 방 안에 앉아서만 맞이하기는 송구한 일이라며, 두어 이웃과 함께 주지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주지봉은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모태의 품 같은 산이요, 한촌 여러 동리를 한 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산이요, 그 여러 동네를 비추는 해를 제일 먼저 바라볼 수 있는 봉우리다.

미명의 어둠 속을 걸어 주지봉으로 가는 길은 엊그제 내린 눈이 걷는 이를 반기듯 발목을 포근포근 감쌌다. 새하얀 은령 위를 새해 소망을 소인하듯 한 발짝 한 발짝 찍어나갔다. 짐승도 새날을 빌고 싶었던가. 앞을 다툰 발자국이 총총 새겨져 있다.

흩날리는 눈의 송이가 점점 잦아지고 커져 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줄기를 이루며 내리기 시작했다. 숲길도 바윗길도 한결같이 새하얗게 덮어나갔다. 눈을 밟고 맞으며 눈 속 가풀막을 오르고 올랐다.

마지막 계단 길 앞에서는 숨을 고르고, 몸도 마음도 다시 가다듬어 한 단 한 단을 조심스레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발등 위에 송이 눈이 살짝 내려앉는다. 정든 이에게서 날아오는 그리움의 문자 메시지 같다.

눈은 계속 퍼부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가르맛길을 다시 올라 드디어 정상에 이른다. 이게 웬일인가. 봉명산, 오정산이, 주흘산, 백화산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샘골 오릿골이며, 띠실 솥골이 다 어디로 들었단 말인가.

오직 보이는 것은 주지봉을 지키고 있는 표지석과 봉우리를 싸고 있는 두어 그루 하얀 소나무뿐이었다. 이런 걸 두고 어느 시인은 눈부신 고립이라 했던가. 세상에서 뚝 떨어져 나와 어느 한 공중에 오도카니 서 있는 것 같았다.

안개, 하얀 안개 천지다. 안개를 내리고 있는 하늘도 하얗고, 산야를 덮고 있는 안개도 하얗고, 내리는 눈도 하얗고, 내려앉은 눈도 하얗고, 눈에 덮인 봉우리도 하얗다. 유색진 것은 봉우리를 딛고 선 사람뿐. 천계가 이러할까, 선경이 이러할까.

오늘 하늘은 우리에게 새해를 신선처럼 살라시며 선경에서 새 날을 맞으라 하시는 것 같았다. 시간도 공간도 없고, 밝음도 어둠도 없다. 선악도 없고, 애증도 없다. 지상의 세계는 샐녘이 되었을까, 몇 점이나 되었을까, 문득 시계를 보니 적이 해가 떠오를 시간이다.

표지석 옆에 두고 동녘을 향해 엎드렸다. 동향 재배로 예를 모으고 나직이 읊조린다.

……새 날 새아침을 경건하게 받드나이다. 올 한해 한 달에 두어 편이라도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어여쁘고 순정한 사랑 가꾸어 나가는 사람살이 되게 해주시고, 가족, 이웃 두루 건강과 평화를 누리게 해 주옵소서…….”

이 하얀 세상에서 무엇을 더 집착하고 탐욕할 것인가. 마음 맑게 모아 조용히 소망의 염을 새긴다. 눈은 눈을 짚은 손등 위에도 내려앉고 숙이는 목덜미 위에도 내려앉는다. 모든 삿된 욕심을 거두어 내려는 듯 순백의 손길로 하얗게 내려앉는다.

이 하얀 세상 속에서는 맑은 소망마저도 속된 욕심이 될 것 같아 조심스럽기만 하다. 소망은 어디로 날아가서, 누가 그 걸 받아 나의 바람을 곱다시 들어줄 것인가. 내 마음을 가다듬는 것일지니, 오직 내 마음에 카랑히 새기는 것일지니-.

소망이란 나의 애쓸 일이요, 지성으로 가꾸어 가야 할 나의 일일 것이다. 이 하얀 산정에서 모든 속된 것을 다 내려놓은 하얀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새기는 다짐일 것이다.

법정 스님이 전하는 학명 선사의 맑은 소리가 함박진 눈발에 섞여 큰 울림으로 내려앉는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라.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가 바뀐 듯하지만, 보라,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을 사네.”

해의 바뀜을 분별하려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지닐 일이다. 오늘 내리는 저 하얀 것으로 마음을 맑게 가다듬고 새롭게 나아갈 일이다. 나타에 젖어가는 마음을 돌려세워 새롭게 가다듬을 일이다.

사위 팔방을 두르고 있는 하얀 것에 몸도 마음도 한없이 침잠되어 가는데, 문득 정적을 깨치는 소리-.

이 벽두부터 이렇게 눈이 퍼붓는 걸 보니 올핸 큰 풍년 들겠네!” 함께 오른 이웃의 생기 찬 목소리다.

오늘 밤엔 윷이라도 한 판 걸판지게 놉시다. 지신을 밟아야지!”

그럽시다! 하하하

주지봉을 내려 설 무렵에는 퍼부어대던 눈도 잦아들고 가깝고 먼 산들도, 오순도순 산 아래 동네들도 제 모습을 찾아갔다. 사람의 세상이 나타났다.

동네에 이르렀을 때 이웃들이 나와 눈을 밀어 고샅길을 틔우고 있었다. 함께 눈을 쓸며 밤에 윷놀이할 일을 이야기했다.

그 밤에 성씨네 집은 왁자한 함성과 함께 열기가 넘쳐났다. 그리고 올해도 더욱 정답게 열심히 살아보자 했다.(20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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