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을 보내기

이청산 2012. 11. 30. 15:21

가을 보내기

 

 오늘도 해거름 주지봉을 오른다. 해가 백화산 마루에 얹힐 무렵이면 언제나 오르는 산이다.

낙엽이 발목을 잠기게 하는 숲길을 따라 오른다. 나무들은 노랗고 붉었던 이파리들을 다 내려 앉히고 푸른 하늘이며 하얀 구름자락들을 걸어놓았다. 층계진 가르맛길을 가쁘게 올라 봉우리에 오르니 노을빛 머금은 갈대가 마을을 향해 정겹게 손을 흔들고 있다.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더니 늦가을 서릿바람에 무척이나 외로움이 깊었던 듯 그림자가 마을 깊숙이로 내려앉았다. 저 긴 그림자만큼이나 가을이 한껏 저물었다는 말이겠다. 가을이 꼬리를 거두어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바빠졌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콩도 거두어야 하고, 무배추도 다 뽑아야 한다. 뽑은 것은 다듬고 얼지 않게 갈무리도 해야 한다. 마른 고춧대도 쳐내고 마늘도 심어야 한다. 들길을 달리는 경운기 소리가 요란하다.

아낙네들의 손길은 더 바빠졌다. 김장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홀로 살거나 부부뿐인 노친네들의 김장이지만 많이 하는 집은 두어 접 배추 절이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객지 식구들 몫까지 다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한골댁에 아낙네들이 모였다. 배추를 접 반이나 절였다. 아들네, 딸네, 동생네 것까지 다하자니 그것도 남는 게 없을 거라 했다. 누구는 무채를 치고, 누구는 양념을 만들고 저마다 일손이 바쁘다. 마당이 잔치 집같이 북적인다.

절인 배추를 씻어 물을 뽑는다. 물기를 뺀 배추에 붉은 양념이며 갖은 젓갈을 넣어 버무린다. 마당 한 곳에 피고 있는 장작불 열기가 마당을 달군다. 아낙들의 분주한 손길을 따라 푸르던 배춧잎이 불잉걸 붉은빛을 닮아간다.

어지간히 했으면, 뒷집 앞집 양반들 다 좀 불러요!”

한골댁은 삼겹살을 석쇠에 얹어 굽기 시작한다. 기름 타는 연기와 냄새가 온 마당을 감돈다. 조 씨, 안 씨가 오고, 아랫마을 이 씨도 들어선다.

, 큰 잔치 났네!” “오늘 같은 날 잔치 안하고 우째여!”

상이 차려지고 막걸리 병이 얹히고 죽죽 짼 김치가 널브러진다. 술잔이 돌고, 김치에 싸인 삼겹살이 남정네들의 크게 벌린 입속으로 든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하하하” “같이 한잔해요! 허허허

대문 앞 논들 볏짚 위에 하얗던 무서리가 잦아들고 들판은 너른 가슴을 열어 푸른 하늘을 담뿍 안고 있다.

아낙네들의 손길은 며칠을 두고 김 씨네 집으로 조 씨네 집으로 채 씨네 집으로 돌고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남정네들도 부르는 점심상이 차려지고, 상 위에는 붉은 양념 칠칠하게 둘러친 김치가 그득했다.

성 씨가 배추를 뽑아낸 텃밭에 마늘을 심는단다. 밭이야 너르던 좁던 마늘씨 한쪽 한쪽씩 흙을 콕콕 찍어가며 촘촘히 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성씨가 골을 타놓은 밭에 함께 힘을 모아 심었다. 한참을 심다보니 늦가을 짧은 해가 벌써 뒷산 마루를 넘어가고 있다. 허리도 다리도 아프지만 그래도 힘 모아 하는 일이라 마음은 노을빛처럼 발그레해진다.

날이 더 추워지면 하기 어려울 것 같아 산에 가서 나무를 좀 해왔다. 베고 잘라 안고지고 내려와 리어카에 싣고 와서 전기톱을 내어 알맞추 자른다. 잘라 쌓은 토막나무는 며칠을 두고 패고 쪼갠다. 군불을 지필 부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당가에 걸어 놓은 솥에 시래기도 삶고, 이따금 고기도 좀 삶아야 한다. 엊그제는 늙은 호박을 썽둥 썽둥 썰어 삶아 호박죽을 끓여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논들에 갈무리하여 쌓아둔 짚더미를 지게차와 트럭이 와서 싣고 있다. 축사가 있는 동네로 실어 가기 위해서다. 논바닥은 그루터기만 남고 훤히 비어간다. 겨울 한철 서리며 눈을 이불처럼 덮고 잠들었다가 봄이 오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것이다.

가을이 찬바람을 남기면서 마지막 꼬리를 거두어가고 있다. 가을 어느 꼬리는 김장독 속으로 들어가 발효되고, 흙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채비를 한다. 또 어느 꼬리는 장작으로 쪼개어져 따끈한 불씨가 되고, 짚더미가 되어 짐승의 속을 채우러 간다.

가을을 보내기 위한 일손들이 바쁘다. 독 속에 들고 흙속에 든 가을이며, 불씨가 되고 먹이가 된 가을이 흐르는 계절을 타고 맛깔스런 찬이 되고, 꽃피고 잎도 피고, 따뜻한 인심도 되고, 흐드러지는 웃음꽃이 되어 피어나게 하려는 손길들로 서릿가을 마당이 분주하다.

그 손들의 배웅을 받으며 세월의 짙은 그림자 속으로 가을이 잦아들고 있다. (201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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