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이를 뽑고 나서

이청산 2012. 10. 17. 15:25

이를 뽑고 나서

 

 뽑으려고 벼르던 이를 드디어 뽑았다. 고통이 시원스레 끝난 것을 두고 앓던 이 뽑은 듯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앓고 있는 이를 뽑는 일이란 이토록 시원할 수도 있을진대, 오늘 뽑은 이는 시원치만은 않은 미련을 남겨 놓고 나에게서 떠나갔다.

오른쪽 위어금니가 고장 난 지는 이십여 년쯤 된다. 풍치로 많이 흔들리는 것을 금속으로 덮어씌워 다른 이에 의지시켜 지금까지 지내왔다. 간간히 통증이 느껴질 때는 약물이나 의사의 손길로 수습하며 버텼다. 이 상태로 더 두면 잇몸 뼈까지 망가져 보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으니, 이쯤에서 빼낼 것을 의사가 권고하였다. 명절을 쇠고 편한 날을 받아 빼기로 했다.

뽑기로 예약한 날 치과에 갔다. 진료 의자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니, 잇몸이 일순 따끔했다. 마취 주사를 놓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뽑을 이를 다 뽑았다고 한다. 한 시간 정도 깨물고 있으라며 재갈 채우듯 무엇을 물려주었다. 잇몸 상태를 가끔 점검해 가면서 몇 달 아물려서 천천히 보철하자고 했다.

여상스럽게 치과를 나왔다. 집으로 와서 깨물고 있던 것을 빼내는 순간, 입 안이 아주 허전하게 느껴졌다. 혀를 대어보니 여태 나에게 있었던 이들이 영 없어진 것이다. 이를 뽑은 것이 그제야 실감으로 새겨져 왔다.

어쩌면 이리도 무정하고 덩둘할 수가 있던가. 평생을 나와 함께 해온 것을, 내 몸의 일부를 이루어 온 것을 이리 무심히도 보낼 수 있는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온갖 먹을 것들을 무던하게 저작하며 내 몸을 지켜준 것이 아니었던가. 그 모습이나마 눈에 넣어두지 못한 미련함이 명치를 아리게 했다.

정이며 감각이 너무도 둔했던 후회를 지울 수가 없다. 어떻게 그것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보내버렸단 말인가. 그게 속이 있다면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 것인가. 지금이라도 치과에 달려가서 다시 보자고 하고 싶지만, 공연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하다. 벌써 쓰레기통에 들어가 깊이 들어 박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야, 나의 이 아린 후회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뽑는 것이며 뽑은 이를 버리는 것이야 그들에게는 너무도 일상적인 다반사에 지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당하거나 행할 때는 예사롭게 넘겨 놓고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느끼고 깨달아 아파했던 일들 몇 가지가 떠오른다.

아버지, 어머니가 써오시던 세간 중에 내가 하나 물려받은 것이 어머니가 쓰시던 옷장이다. 경첩이며 귀잡이와 자물쇠를 백동으로 장식한 검누른 옻칠 이층 옷장인데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 오신 것이다. 오랜 세월 애지중지 갈무리한 어머니의 손길이 반질반질 나있었다.

세월의 더께가 끼어가는 사이에 이곳저곳 상한 곳이 있어 고가구 수리점에 보내어 수리하였다. 수리를 맡기면서 때가 많이 끼어 제 노릇이 되지 않는 자물쇠를 잘 닦아달라고 수리공에게 특별히 부탁하였다.

말끔히 수리하여 가져 왔을 때 보니, 자물쇠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새것이 달려 있었다. 아무리 닦아도 깨끗하게 닦이지 않아 아예 새것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러려니 하며 들여 두고 보는 사이에, 마음에 아릿한 느낌이 일어났다. 잊고 있었던 생채기가 번져나는 것 같았다.

저건 어머니 것이 아닌데, 온갖 사연이 서려있을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것이 아닌데……. 저걸 받을 때, 수리공에게 본디 것을 내 놓으라고, 본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왜 말 한마디 못했을까. 후회를 해도 그 때는 이미 수개월, 수년이 흐른 뒤였다.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오면서도 후회로 아린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라가 야단났다. 재정이 거덜 나서 나라가 곧장 넘어질 지경이라 했다. 공장은 문을 닫고 근로자는 거리로 쫓겨났다. 국제기구에 돈을 꾸어 와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지니고 있는 금이라도 모아 수출하자는 운동이 국민들 사이에서 마른 산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것으로라도 외화를 확보하여 나라의 재정을 돕자는 것이다.

나도 나라에서 봉록을 받고 사는 사람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싶어 가지고 있는 금붙이를 모두 내어놓기로 했다. 아내와 내가 결혼할 적에 주고받은 예물들이며, 아이들 돌 반지, 그리고 어머니가 아껴 지니시다가 유품으로 남기신 반지까지 다 털어 내놓았다.

그 때는 할일을 했다는 생각과 함께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의 반지하나쯤은 남겨 놓을 걸…….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물려준다면 조상의 사랑을 일깨우는 일이 되지 않았을까. 어머니께 큰 불효를 저지른 것 같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 때 나는 우국지사연하는 설익은 감상에 젖었던 것 같다. 십 수 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금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몇몇 사람이 해서는 안 될 부정한 짓을 하여 사욕을 채웠다는 보도를 본 뒤로는 그 아쉬움이 더욱 커졌다.

뽑은 이를 무심히 보내버린 오늘, 지난 내 삶 속의 후회스러운 기억들이 여울물 속에 간간히 고개를 내민 수초처럼 흔들리며 떠오른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미련스러운 일들을 지어왔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덩둘한 일을 지을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누가 말했다던가. 오늘 이 시각을 중히 여기고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을 중히 여기려 하면서, 되도록이면 후회할 일 없이 하겠다는 마음을 여리게나마 걸고 살아왔다.

그러나 타고난 우둔은 어쩌지 못해 오늘도 아쉬운 일 하나를 또 짓고 말았다. 설령 후회스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웬만한 것쯤은 모르는 척, 안 그런 척 뭉기면서 살아오기도 했지만, 뽑은 이 무람없이 보낸 오늘의 일이 아린 후회로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살아온 날들보다는 마냥 여리게 남은 살아갈 날들 속에 오늘 같은 후회가 다시 없기를, 쉼 없이 빠져나가는 내 삶의 날에 현명이 함께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2012.10.13)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보내기  (0) 2012.11.30
서로 그립다는 것은  (0) 2012.11.27
생일 풍경  (0) 2012.09.22
상사화가 잘렸다  (0) 2012.08.27
초원의 별  (0) 201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