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생일 풍경

이청산 2012. 9. 22. 11:39

생일 풍경

 

 생일이라고 아이들이 왔다. 생일날이 마침 주말이라 아들네 식구는 금요일 밤을 돋우어 달려오고 딸 식구는 생일날 왔는데, 사위는 일요일에도 비상근무가 있다며 못 오고 축하 전화만 했다. 딸이 외손녀 예지를 데리고 오니 제일 좋아 하는 건, 손녀 승윤이다.

생일날 아침에 아들 내외는 승윤이와 함께 아비, 어미에게 절하며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둘째 승민이는 돌 지난 지 너덧 달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 달려와 안기는 게 가장 기쁜 인사다.

미역국으로 차린 두렛상에 함께 둘러앉았다. 아들은 아비에게, 이제 다른 걱정은 마시고 오직 건강 하나만 잘 지키시라고 축복했다. 다른 걱정 안 하게 하려면, 너희들이 마음을 모아 아들 하나쯤 더 낳고 더욱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일렀다.

점심나절에 딸이 제 아이를 데리고 도착했다. 딸도 손녀와 함께 나부시 절하고 아비, 어미의 건강을 빌어주었다.

오랜만에 사촌끼리 만난 승윤이와 예지는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일곱 살, 여섯 살로 한 살 터울이지만 몸피며 노는 품이 선후를 가릴 수 없을 만치 엇비슷하다. 저들끼리 손을 잡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수다를 떨고,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고, 아이패드를 펼쳐놓고 함께 보며 깔깔거리는 모습들이 귀엽다.

승윤이가 한 살 더 먹었다고, 백지에다 서로 손잡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그리고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적어 예지에게 선물로 준다. 글자도 그림도 제법이다. 예지는 소리 내어 읽으며 좋아한다. 언제 저리 쓰고, 그리고, 읽는 것을 깨우쳤는지 여간 대견스럽지 않다.

저 아이들이 저렇게 맑고 티 없이 재미나게 노는 걸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생일날이 참 좋다. 여느 주말에도 남매가 함께 찾아와 놀다 가곤 하지만, 오늘은 오직 나의 축복을 위하여 찾아온 아이들이라 생각하니, 노는 품들이 더욱 귀애스럽기만 하다.

언제 세월이 그리 흘러 저것들이 내 생애 속에 저렇게 들어와 있는가. 그리고 나는 저 어린것들이 노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늙은이가 되어 있는가. 오직 건강 하나만 챙기면 되는-.

그래도 저것들을 보면 흘러간 나의 세월들이 그리 덧없지는 않은 것 같다. 저 아이들을 내 생애 속에서 맞이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복 받은 일인가.

아이들과 함께 색 고운 우산을 들고 가랑비 오는 들길을 걷는다. 서서히 황금빛을 내며 고개를 숙여 가고 있는 논들의 벼를 보고 너무 예쁘다며, 할아버지는 이런 걸 늘 보면서 살아 참 좋겠다고 한다. , 좋고말고! 더 좋은 건 오늘 같은 날, 너희들과 함께 이렇게 걷는 거란다. 할아버지 생일날이 한 달에 한 번쯤 있었으면 좋겠다.

저녁에는 케이크를 얹은 상을 차리고 아비가 좋아하는 술을 곁들였다. 두 손녀가 율동을 곁들이며 노래를 부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할아버지 생일을……♬

노래 소리와 손뼉 소리가 온 거실을 달구었다.

아내와 함께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자르자 아이들이 손뼉을 친다.

그래, 그래 고맙다. 우리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자구나!”

아내도 아들도, 딸도 며느리도 모두 술잔을 함께 들었다.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조금씩 따른 잔이지만, 축배의 술을 맛나게 들고 다시 손뼉을 친다. 돌배기 어린것이 뭘 안다고 애잎 같은 손을 들어 짝짜꿍을 친다. 웃음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활짝 피어난 웃음꽃-. 어쩌면 이 꽃 한 송이를 보기 위해 내 육십여 년의 세월을 살아 온지도 모르겠다. 세월의 줄기 위에 봉오리 맺어 만발하게 피어난 이 아름다운 꽃을!

지난 세월이 주마등 되어 머리와 가슴속을 흘러간다. 그 속에는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도 딱지 앉은 생채기처럼 똬리를 틀고 있고. 언제까지나 고이 보듬어 간직하고 싶은 시간들도 함초롬히 핀 들꽃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모두가 내 생애를 쌓아온 것들임에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랴. 남은 생애를 두고 모두 함께 안고 가야할 시간들이다. 그 세월 속에서 저 아이들이 태어나고, 오늘 나는 저 아이들로부터 삶의 축복을 받고 있지 않은가.

다산 선생의 어록 중에 가버린 것을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을 기약하지 못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다.’라고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렇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세상에 또 있을까. 더 큰 행복이 또 있을까. 장차 올 세월도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오늘 같은 웃음소리와 손뼉소리가 늘 이어지면 좋겠다. 그러나 어찌 그렇기만 하랴. 세상사는 일에 어찌 웃음소리만 있으랴.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늘어나는 일이라 했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난 것도 둥글게 보일 수 있고, 날카로운 것도 부드럽게 보일 수 있고, 내게로 오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도 안다고 했다.

오늘 이렇게 나이를 먹어 가면서 마음의 눈을 더욱 맑게 닦을 일이다. 세상 모든 소리가 오늘의 웃음소리와 손뼉소리로 들릴 수 있도록 닦을 일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집착도 욕심도 가질 필요가 없는 세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축원대로 건강 하나 잘 지키며, 사랑할 건 사랑하고 그리운 건 그리워하면서 살면 될 일이다.

이십여 년 전에 얻은 요통이 간혹 다리를 저리게 한다. 적절한 운동으로 다스려 가야 하리라. 내일 아침에도 유홍초며, 메꽃, 물봉선과 눈인사를 나누며 물 맑게 흐르는 강둑을 걸어야겠다.(201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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