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상사화가 잘렸다

이청산 2012. 8. 27. 12:53

상사화가 잘렸다

 

 상사화가 잘려 쓰러졌다. 마을 숲에 다소곳이 피어있던 상사화가 쓰러져 널브러졌다.

소나무며 느티나무며 팽나무며 오래된 나무들이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마을 숲은 마을 사람들의 아늑한 품이다. 노거수 아래에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나무들 사이로 온갖 풀들이 자욱이 솟아 있다. 풀들 사이로 때로는 갖가지 들꽃들이 고개를 내밀어 숲을 한층 정겹게 한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그늘을 찾아오고, 공공근로자들이 마을 숲에 나타났다. 그들은 우거진 풀들을 베고 깎아나갔다. 그늘을 찾는 사람들을 안락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나무 아니면 풀이었다. 나무만 남기고 풀들은 모두 베어냈다.

제단 옆에 곱게 피어있던 상사화도 그 풀들 속에 싸여 무참히 잘려 나갔다. 아름다운 꽃도 그들에게는 무성한 풀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베어놓고 나서야 고운 빛 꽃잎이 보였던가. 베어진 풀은 갖다 버리면서도 잘려진 상사화는 베어낸 자리에 눕혀 놓았다.

마을 숲의 상사화를 처음 본 것은 이태 전, 더위가 한 고비를 넘어서던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 나의 한 생애가 마감을 몇 달 남겨 두지 않은 때였다. 그 마을 숲이 있는 마을은 다음 생애를 위해 삶의 터를 예비해둔 곳이었다.

친구들이 그 마을의 풍광이 보고 싶다고 했다. 친구 두 사람과 함께 한 시간여를 달려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 숲을 가슴으로 하여 두 날개가 감싸고 있는 듯 아늑한 지세를 보고 친구들은 그 마을에 살아갈 나를 축복해주었다.

마을 정경을 바라보며 숲 그늘에 앉아 잠시 쉬려는데 무성히 자라 있는 온갖 풀들이며 야생화 사이에 솟아있는 유난히 고운 빛깔의 꽃 몇 송이가 문득 눈길을 끌었다. 상사화였다.

마늘종처럼 솟은 연초록 대궁 끝에 나발처럼 벌인 대여섯 쪽의 분홍색 꽃잎, 그 속에 몇 가닥 꽃술을 내밀고 있는 품이 연분홍 옷자락을 곱게 여미고 살포시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여인네의 모습 같기도 했다. 이런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있는 마을에 살게 되어 참 좋겠다며 친구가 감탄했다.

상사화가 이울어가던 가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여 겨울이 이슥해 갈 무렵에 완공을 했다. 그리고 겨울의 끝자락에서 한 생애를 정리하고 상사화가 피는 마을 숲이 있는 마을로 삶의 터를 옮겨와 새로운 생애를 시작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자 그 상사화는 고운 모습 그대로 또 피어났다. 작년에 함께 보았던 친구를 불러 다시 함께 보았다. 눈 시리게 진하지도 않고 바랜 빛처럼 연하지도 않은 곱디고운 연분홍빛이 작년과도 같았다. 무수한 풀들 속에 피어있는 것이 더욱 고운 자태를 빚어내게 하는 것 같았다. 친구는 그 고운 자태를 작년보다 더 감탄했다.

그 여름에 그 친구와 다른 곳에서 상사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고창의 선운사를 갔다가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 고택을 들렀었는데, 그 마당에 한 무덕 피어있는 상사화가 찾는 이를 반겨 맞고 있었다. 그 꽃을 보며 우리 마을 숲 상사화를 다시 상기했다. 무덕으로 피어 있는 꽃도 아름답지만, 뭇 풀들 속에 함초롬히 피어 있는 모습도 참 괜찮더라고 했다.

다시 한 해가 지나 여름이 왔다. 늘 피던 그 자리에 그 꽃이 또 피어났다. 곱고 아름다운 자태는 변함이 없었다. 친구에게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 꽃의 자태가 변함이 없듯, 친구의 감탄도 변함이 없었다. 친구는 다시 내 사는 마을을 축복하고, 나를 축복해 주었다.

그렇게 축복을 받던 여름 어느 날 아침, 마을 숲으로 산책을 나왔을 때 무성하던 온갖 풀들이 사라지고 숲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시원스럽게 잘 정리했다 싶다가,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챈 순간, 가슴도 눈길도 얼어붙고 말았다.

생기 잃은 꽃잎을 땅에 깔고 누워 있는 꽃대가 애처롭고도 애잔했다. 상사화는 살해 당한 시신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무차별 살해, 묻지마 살해였다. 사람만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 고운 꽃도 저렇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낯설게 떠도는 것을!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홍해리, 상사화

 

참으로 곤비한 영혼이었다. 잎도 꽃을 볼 수 없고, 꽃도 잎을 만날 수 없어 서로 그리기만 하면서 애타게 피고 지는 꽃이라 했던가. 그래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녔던가.

친구와 그 꽃을 함께 보면서 꽃의 애잔한 사연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고움과만 마음을 주고받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았다. ‘묻지마 사랑이라 할까. 사랑에 묻고 따질 일이 필요할까.

세상에는 묻지마 살상이 횡행한다더니, 그 살상의 심리는 꽃에라고 다르지 않는가 보다. 사랑이 살상을 당한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하소할 길 없는 상심을 안은 채 내년 여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기다릴 계절이 있음이 차라리 다행이련가.

친구와 함께 축복의 계절을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 때까지는 저도 나도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이 되어 낯설게 떠돌아야 할까 보다.(201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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