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길 다듬기

이청산 2012. 7. 11. 05:57

길 다듬기


비가 많이 내렸다. 많이 기다리던 비다. 콩을 심어 놓고 속을 태우던 사람들이 제일 좋아했다. 강물도 많이 불었다. 바닥을 드러내 보이던 강물이 이젠 봇둑을 넘어 처렁처렁 흐른다. 넘치는 강물만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넉넉하다.

비 온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의 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특별히 작은 괭이 하나를 들고 나선다. 길섶에 금계국이며 개망초가 줄지어 핀 강둑길을 걷는다. 억새 숲 사이로 시원스럽게 흐르는 강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 그대로의 강둑길은 군데군데 크고 작게 팬 자리에 빗물이 가득 고여 있다. 어떤 곳은 길 폭 가득 물이 고여 발을 벗고 건너야 할 지경이다. 그대로 빠지기나 마르기를 기다리려면 한참 날이 흘러야 할 것 같다. 저 물을 누가 둑 아래로 빠지게 해 주랴.

아침이면 날마다 걷는 나의 길이거늘, 누구에게 다듬어 주기를 바랄 것인가. 들고 간 괭이로 길섶을 파기 시작했다. 돌이 박혀 있고 풀뿌리가 엉겨 있어 파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깨에 힘을 주며 파내니 드디어 골이 패여 물이 빠져 나갔다. 물은 골을 키워가며 솰솰 빠져 나간다. 몇 곳을 그렇게 파고 나니 온몸은 땀범벅이 되고 손가락 하나가 아리고 따갑다. 땅을 찍은 충격으로 살갗이 벗겨져버렸다. 한참을 두고 아팠다. 그래도 무슨 큰일이나 해낸 듯 뿌듯한 마음으로 괭이를 흔들며 집으로 돌아왔다.

활짝 갠 이튿날 아침 다시 강둑길 산책을 나섰다. 강물은 어제보다 더 맑게 흐르고 강물 위로 해오라기가 날고 있다. 길이 말짱하다. 어제만 해도 곳곳에 흥건히 고여 있던 빗물이 말끔히 빠졌다. 발을 젖혀 뛰지 않아도 벗지 않아도 가볍게 걸을 수 있어 좋았다. 구슬땀을 흘리고 손가락을 상하며 힘을 들였던 어제의 길 다듬기가 즐겁고도 상쾌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날마다 가는 길은 또 있다. 해거름이면 늘 오르는 산길이다. 이 한촌에 삶의 터를 잡은 까닭 중에 하나가 집 뒷산 주지봉을 오르는 산길이 있기 때문이다. 봉우리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지는 벌판이며, 벌판 먼 버렁을 병풍처럼 둘러친 크고 작은 산들이며, 그 자락에 오순도순 살갑게 모여 사는 마을이며, 그 풍경들이 빚어내는 안락한 평화가 좋아 날마다 오르는 산길이다. 그 봉우리를 오르면 먼 곳 그리운 사람이 풍경 어디쯤서 미소 안고 걸어올 것 같아 설레는 마음으로 오르기도 하는 길이다.

가파른 가르맛길이다. 어느 고마운 사람들이 수고를 마다않고 가풀막 군데군데에 가로목을 놓아 삼백여 층계나 닦아 놓았다. 꼭대기를 막 오를 무렵이면 무려 일백일흔세 계단이나 잇달아 놓여 봉우리 등정을 위한 마지막 공력을 다 쏟게 한다. 힘 다하여 오르는 순간 쾌재가 폭발하듯 가슴을 뛰쳐나온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주지봉 오르는 길의 가로목도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지 않는다. 어떤 가로목은 제 몸뚱이가 잘린 줄도 모르고 봄이 오면 싹을 틔워내어 안쓰러운 마음을 들게도 하지만, 비바람 견디지 못해 썩고 쳐지는 것도 있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밟고 오르는 가로목이 툭하고 내려앉을 때는 민망하고도 안타까워 쉽사리 발을 옮겨 디딜 수가 없다. 그런 일을 몇 번 겪던 어느 날, 접톱과 손괭이를 들고 산길을 올랐다. 봉우리에 올라 언제나 그렇듯 이내 은은히 낀 평화로운 벌판이며 마을을 내려다보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내림길을 잡는다.

내려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길쭉한 상수리나무를 베어 몇 토막을 내었다. 계단 길의 썩은 가로목을 들어내고 새로운 것으로 갈아 넣었다. 십수 층계를 그렇게 바꾸고 나니 해는 봉우리를 완연히 넘어 산그늘은 짙어지고 손에 팔에 힘은 모두 소진되었다.

내가 아끼면서 다니는 길을 내 힘으로 다듬었다는 대견스런 느낌 때문일까. 몸은 지쳐버렸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산을 내려와 목욕을 하고 나니 피로감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저녁 밥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는 반평생 넘게 걸어오던 길을 청산하고, 다시 최선이라고 여기고 믿은 길을 찾아와 이 한촌을 살고 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갈무리할 것은 갈무리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가고 있다. 이 길은 어떠한가. 어디 팬 곳에 물이 고여 있어 발 적실 일은 없는가. 오르고 내리는 길에 층계가 썩고 쳐져 있어 발 삘 일은 없는가.

오늘도 강둑 산책길을 걷고, 주지봉 등반길을 오른다. 삶의 길을 걷고 오른다. 그 길에 고인 물이 있으면 빼주고 쳐진 가로목이 있으면 갈아주어야 할 일이겠다. 삶이 나에게 머무는 그 날까지 언제나 다듬으면서 가야 할 길이겠다.

그리운 이를 그리며 살 수 있는 삶의 생기를 위하여,

주지봉 아래 저 벌판 같은 평화의 생애를 위하여-.(20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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