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초원의 별

이청산 2012. 8. 16. 12:50

초원의 별


태양이 뜨거운 만큼이나 논들의 푸름도 짙어져 갔다. 초원을 이루며 짙푸르러 가는 논들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싱그러운 청량감에 젖게 했다.

망두걸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초원의 푸른빛을 보며 희열에 젖는다.

그렇게도 덥더니만 나락이 잘 컸네!”

역시 여름은 좀 따끈해야 돼!” 토실한 알곡이 눈 속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초원이 나날이 푸름을 더해가던 어느 날, 문득 논들머리의 가로등이 불빛을 감추었다. 밤이면 집도 고샅도 모두 어둠속에 잠겼다. 차량의 불빛도 네온사인도 없는 마을은 칠흑의 어둠, 어둠뿐이었다.

해 기웃할 무렵이면 망두걸에 모여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이슥토록 놀던 사람들이 짙어지는 땅거미와 더불어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익은 발길을 따라 빛 한 줄기 없는 고샅 속으로 더듬더듬 들곤 했다. 그래도 이리 어두운 밤을 어찌 보내겠느냐고 원망하거나 푸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이 되면 나락이며 작물들도 밤을 밤답게 지내도록 해줄 필요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둠이 꽃을 피게 하고 이삭을 패어나게 한다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논들에서 자라고 있는 온갖 것들은 자식 못지않게 소중한 것임을 간곡하게 알기 때문이다.

들머리 가로등이 빛을 숨긴 날부터 별은 더욱 또렷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밤이 깊을수록 더욱 밝은 빛을 내쏘고, 날이 흐를수록 더욱 많이 반짝이기도 했다. 초원의 밤하늘-.

 

초원의 밤하늘에는

어둠보다 빛이 더 많다.

……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밝게 빛난다.

우리 안에 있는 별도 그렇다.

별을 아름답게 볼 수 있으려면 다른 불은 꺼야 한다.

가까이 있다고 더 밝은 것도 아니다.

간절함이 깊을수록 밝게 빛난다.

오직 간절함만으로.

              - 신영길의 초원의 바람을 가르다중에서 -

 

그랬다. 초원의 밤하늘에는 어둠보다 빛이 더 많았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별이 더욱 밝고도 아름답게 빛났다. 불 없는 가로등 위로 총총 별을 솟구어내고 있었다.

초원의 별은 밤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늘에서만 빛을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가로등이 빛을 감추던 날부터 마을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별이 뜨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밝은 빛을 내는 별이, 초원의 여름날이 깊어갈수록 더욱 아름다운 빛을 내는 별이 한촌 사람들의 가슴속마다에 자라나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나락들은 꽃눈을 맺고 알속을 여물리어 이제 곧 꽃 피어나 이삭이 패고, 팬 이삭은 토실토실 영글어가겠지. 초원은 이윽고 황금의 들판으로 변해 갈 것이고 이삭들은 묵직이 고개를 숙여가겠지. 들판을 스치는 바람 따라 뒷골 산비알의 밤도 통통 알을 채워 갈 것이고, 앞마당 감나무엔 전등을 단 듯 붉은 감들이 주렁주렁 맺히겠지.

저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밤이 익고 감이 빛을 낼 무렵이면 한가위가 다가오고, 그 때는 대처에 나간 아이들이 모두 집을 찾아오리라, 초련 오려로 두어 말 찧어 두었다가 아이들 돌아갈 때 실어 주어야겠어. 어린것들 먹으라고 찐쌀을 좀 할까. 단 것에만 입이 익은 것들이라 그런 것도 좋아할까.

노친네들의 가슴에 뜬 별들이 반짝이는 빛을 피워냈다. 가까이 있다고 더 밝게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먼 소망일수록 마음은 더 간절해 왔다. 넉넉하게 안겨 올 가을이며, 반갑게 찾아올 아이들이 간절한 별이 되어 가슴을 환하고도 또렷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오직 간절함만으로-.

땅거미를 이고진 채 한참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던 망두걸 노친네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뜬 초원의 별들을 하나씩 안고 짙어진 어둠속을 유영하듯 헤치며 고샅을 지나 집으로 든다.

노친네들이 별이었다. 밝고 따뜻한 빛을 품은 초원의 별이었다.(201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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