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자연과 더불어

이청산 2012. 7. 22. 18:44

자연과 더불어
-청우헌일기·20

 

 여름이 한창 익어가던 초복날, 해가 기웃할 무렵 마을 어르신네들이 망두걸에 모였다. 망두걸은 고샅 어귀 논들머리에 있는 어르신네들의 놀이터다. 아내가 전이며 떡, 수박과 약간의 술을 내어왔다. 개장국은 없을지언정 복달임이나 하자고 했다. 모여 앉은 어르신네들에게 술 한 잔씩을 권하면서 더위 잘 나시라고 했다.

이런 좋은 일이 있나, 고맙기도 해라.”

제가 오히려 고맙지요.”

참 고마운 일이었다. 한 생애를 정리하고 남은 삶을 산수 좋은 곳에 의지하여 살아보겠다고 이 한촌을 찾아와 살고 있는데-. 바란 대로 산이며 물이 좋기도 하지만, 더 좋은 것은 정이요, 인심이었다. 나물 철엔 나물을 나누고, 과일 철엔 과일을 나누고, 조그만 것이라도 색 다르고 맛 다른 것을 서로 나누는 인심이,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하고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산수만 보고 찾아와 사는 사람이 이 인심을 어떻게 갚음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으로 이 순후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마을에 들 때는 그저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조용히만 살면 될 줄 알았다. 이웃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웃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근거도 없이 들어와 사는 사람이라 긴하게 느끼는 것이라도 있는지, 불비한 것이나 없는지, 애써 살펴주려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이웃이 있음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하는 발견은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하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조선 시대 어느 사대부 집안의 부인이 노래했다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시장과 먼 곳에다 살 곳 정하고     卜居遠朝市(복거원조시)

약초 심고 이엉 엮어 집을 지었네.   種藥又誅茅(종약우주모)

꽃 앞에는 술이 있어 함께 취하나   酒有花前醉(주유화전취)

버들 아래 문 있어도 찾는 이 없네門無柳下敲(문무유하고)

                              -서영수각(徐靈壽閣, 1753~1823). 호운(呼韻)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로 시작되는 노천명(盧天命, 1912~1957)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를 연상하게 하는 시다. 번잡한 세속을 떠나 오직 자연과 더불어 호젓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들이야 때로는 자유를 억압당하기도 하면서 세속 살이에 시달릴 일이 많은 사람들이라 세속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곡진했을지 모르지만, 소로(H.D.Thoreau)가 아니고서야, 법정(法頂) 스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세속을 그리 쉽사리 모른 체할 수 있으며, 청정한 자연과만 벗하여 살 수 있으랴. 누가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로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랴. 고요하고 맑은 자연과 더불어 살가운 이웃이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때때로 이웃에게도 가고, 가끔 이웃을 부르기도 했다. 갈 수 있고 부를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이 즐겁고 정겨웠다. 지난 생애의 도회 생활에서는 보기도 느끼기도 어려웠던 인심이요, 풍경이었다.

그간에 받은 정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갚음할까를 생각다가 복날을 빌미 삼아 망두걸 놀이터에 이웃과 함께 앉았다. 과일 몇 쪽일지언정 둘러앉은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 어르신들은 크고 작은 마을 일로 분분한 화제를 삼았다.

선생님 아이면 우리가 우째 테레비에 나와 보겠노!”

어느 신문에 발표한 나의 글 대문을 괜히 달았다가 계기가 되어 한 방송국에서 나와 서로 정 나누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하여 고향 에세이, 정겨운 고향 못고개에 살렵니다라는 제목으로 방송했던 일이 한참 화제에 올랐다.

먼갓할매하고 오천할매가 젤로 마이 나왔데!”

오천할매는 가수 아이가. 노래 한 자락 하소!”

읍내 노래교실에 다니는 오천할매에게 노래를 청하며 모두 박수를 친다.

오천할매가 주저 않고 일어나 노래를 부른다.

내 인생 고달프다 울어본다고 누가 내 맘 알리요?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

신곡도 능숙하게 부르는 오천할매의 노래가 끝나자 터지는 함성과 박수소리가 논들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나락 잎을 요동치게 했다.

다시 술이 한 순배 돌고원골할배가 벌떡 일어선다.

나도 한곡 합시다. ……호옹도야 우지마라 오오빠가 이있다.♬……

한껏 신이 난 듯 2절까지 불러 제치자 박수소리가 고샅 멀리로 퍼져나갔다.

어느 새 그릇들은 다 비고 기울던 해가 고갯마루에 성큼 올라앉았다.

아따, 오늘 복 땜 한번 걸판지게 했네!”

고마버요. 고마바

탕건봉 우거진 숲이 더욱 푸른빛으로 다가서고 박수소리에 묻혔던 새소리 매미소리가 싱그러운 노래가 되어 울려왔다.

푸른 숲 새소리만이 자연이 아니었다. 모두 자연이었다.(201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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