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이청산 2012. 8. 12. 15:44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청우헌일기·21

 

 며칠째 주지봉을 오르지 못했다. 주지봉을 못 올랐다는 것은 하루 생활 중에서 가장 큰 의의를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루를 어떻게 지냈든 저녁 답에 주지봉을 올랐다가 내려와야 하루를 제대로 산 것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답답한 일이 있었던 날일수록 주지봉에 올라야 하루가 시원하게 정리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삶에 대한 나의 간곡한 소망은 장수를 바라기보다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위하여 나름대로 애쓰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적절히 움직이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한 체조를 하고,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강둑길, 들길을 걸으며 맑게 흐르는 물을 보고,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는 농작물들을 본다. 그런 것들을 눈에 넣으며 걷노라면 생동하는 대지의 기가 몸속 깊숙이로 스며드는 것 같다.

해질 무렵이면 주지봉으로 향한다. 가풀막 가르맛길이 힘도 들고 땀도 많이 흘려야 하지만, 그 드는 힘과 흘리는 땀이 오히려 몸을 청량하게 한다. '미국 시의 아버지'라고 하는 윌리엄 브라이언트는 숲은 신의 첫 성당이라고 했다던가. 봉우리를 오르내릴 동안 온몸을 감싸는 푸른 숲길은 심신을 상쾌하게 하다못해 자연에 대한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 길을 걸어 봉우리에 오르면 멀리 가까이에 있는 여러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과 함께 질펀히 펼쳐져 있는 포근하고도 아늑한 삶의 터전들이 한껏 품안에 든다. 그 풍경 보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깃들여 있는 온갖 찌꺼기들이 다 가셔지고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차곡차곡 채워져 오는 것 같고, 가슴에 차있던 그리움도 허물 벗은 새로운 그리움이 되어 새록새록 안겨드는 것 같다.

이 때, 법정스님이 <오두막 편지>에서 들려준 헬렌 니어링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새롭게 새겨져 온다. 스물여섯 살이던 헬렌이 스물한 살 위인 스코트 니어링을 만나 55년의 세월을 서로 최고의 벗이자 연인이며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아름답게 살았다고 한다. 나이 차이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성과 많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존중하고 보완해 주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이야기를 담은 <아름다운 삶,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을 통해 그들의 건강과 장수를 위한 생활태도를 이렇게 제시했다고 한다.

적극성, 밝은 쪽으로 생각하기, 깨끗한 양심, 바깥일과 깊은 호흡, 금연, 커피와 술과 마약을 멀리함, 간소한 식사, 채식주의, 설탕과 소금을 멀리함, 저칼로리와 저지방, 되도록 가공하지 않은 음식물, 이것들이 삶에 활력을 주고 수명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흙을 가까이하고, 약과 의사와 병원은 멀리하며 자연스럽게 살라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지키기는 물론 쉽지 않은 일들이다. 나에게 있어서 제일 지켜지지 않는 것은 술이다. 마음의 즐거움과 건강이 신체의 건강도 도울 수 있으리라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헬렌과 스코트의 생활태도를 따라 보려고 애쓴다.

그렇게 들길을 걷고 산을 오르고, 헬렌과 스코트의 생활태도에 여리게나마 생각을 걸어온 덕분인지 몸 가볍고 마음 상쾌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아령도 들고 철봉도 당기면서 근력도 괜찮게 유지해나갔다. 나이 같지 않은 외모와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간혹 주위 사람들로부터 선망(?)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쪽 다리가 무릎 아래로 몹시 아팠다. 이십여 년 전 허리디스크를 앓은 게 좀처럼 가시지 않는 만성 병통이 되어 간혹 허리와 다리에 약간의 통증을 일으켜 왔다. 그래서 항상 조심한다고 하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 어디 자세가 나빴던지, 뜻밖의 충격을 좀 받았던지 다리 한쪽에 이상이 생겼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움직일 때의 불편을 그대로 참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읍내 한의원에 가서 며칠 부항을 뜨고 침을 맞는 진료를 받았더니 차츰 나아지고 있다. 한 이틀 더 조섭하면 정상으로 돌아와 줄 것 같다. 다 나으면 다시 경쾌한 걸음으로 주지봉을 오르고, 맑게 흐르는 강물에 눈길을 담그며 강둑을 걷고 싶다. 기운차게 오르고 걸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과신하지 말고 방심하지 말 일이다. 흐트러지지 않은 정신이야말로 건강의 으뜸 지킴이가 아니겠는가. 후배 한 사람은 치료시기를 놓친 당뇨 때문에 발가락 하나를 잘라냈다기도 하고, 동년배의 어느 친구는 뇌졸중으로 신체의 일부가 제 기능을 벗어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죽음이야 이름과 늦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죽음에 깊은 생각을 걸 것이 아니라 건강한 심신을 지니기 위해 몸과 마음을 기울일 일이다.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살다가 깨끗하고 담백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스코트의 삶을 돌아보며, 그처럼 70대에 노령이 아니고, 80대는 노쇠하지 않고, 90대는 망령들지 않는 삶이 되기를! 조용한 소망으로 보듬어 본다.

스코트 니어링처럼 깨끗하고 담백하고 산뜻한 죽음을 맞이했던 법정스님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생전의 삶이 오롯이 담긴 <오두막 편지>, 그 말씀들이 주지봉을 며칠째 못 오른 오늘 더욱 큰 울림이 되어 온몸을 적셔 온다.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살기를 애쓸 일이다.(201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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