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제 살 자리(2)

이청산 2012. 5. 27. 22:54

제 살 자리(2)
-청우헌 일기·18


정원에 반송(盤松)을 새로 심었다.

한촌에 작은 집을 지어 마당을 꾸미면서 정원에 조그만 반송을 한 그루를 심었다. 작년 봄의 일이다. 둥그스름한 우듬지 수관(樹冠)도 제법 아담하여 관상하는 즐거움이 괜찮다 싶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날 때까지는 제 모양을 잘 지키는가 싶더니 가을이 되면서 뾰족한 바늘잎들이 하나둘씩 말라갔다. 사철 푸른 나무라 하지만 계절의 변화에 영 무심하지는 않는가 보다고 여겼다.

겨울이 들자 잎은 더 말라들었고,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급기야는 모든 잎들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지경에 이르렀다. 아담하던 수관도 간곳없고 늙은이의 야윈 손등에 난 핏줄 같은 줄기만 앙칼지게 드러났다. 추운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오면 소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 손을 써 볼 수 없는 것이 딱하기만 했다. 한 이웃은 그네 집 소나무도 겨울 지나면서 죽는 듯싶더니 봄이 오자 살아난 적이 있다며 위로해 주었다.

시나브로 봄이 오고 있었다. 주위의 꽃나무들은 눈을 틔우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잎을 피워갔다. 그래도 반송은 새 눈을 뜰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봄이 무르익어 갈 때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날 가지 하나를 잡아보니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손을 대자 으스러지듯 부러져나갔다. 어느 쪽 줄기에도 가지에도 산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부분도 생명감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반송이 생명 유지를 위한 조건과 영양분을 지니지 못한 채 우리 집에 왔던지, 아니면 우리 집에 와서 보니 생육 조건이 맞지 않아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 가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찌하였던 우리 정원이 제 살 자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푸나무들은 제 나름의 생명력을 유지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유독 반송만이 새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 나무를 심어준 조경업자에게 연락을 했더니, 와서 보고는 다른 나무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다. 새로운 나무를 가져다 심었다. 수관은 전의 것에 미치지 못하는 듯도 했지만 그런 대로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새 것을 심기 위해 죽은 것을 파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심겨진 상태에서 새로운 뿌리를 조금도 뻗어내지 못했다. 심어질 때의 그 뿌리 그대로 말라가기만 했던 것이다. 옮기는 과정의 문제였던가, 토양의 문제였던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가. 잘 살고 있는가.

그 나무가 생전 처음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왔듯이 나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땅을 찾아와 살고 있다. 산이 있고 물이 흐르고 새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생애를 정리하고 궁벽한 한촌을 찾아왔다. 이 새로운 땅에서 첫 사철이 흘러가고 두 번째의 봄이 세월의 강을 건너고 있다.

그 계절이 흘러 갈 동안, 고맙게도 산이 늘 가슴을 열어주고, 물이 다정히 흘러주고, 새소리 바람소리가 포근히 안겨왔다. 이웃들도 정겨웠다. 뒷집 조 씨, 옆집 성 씨, 앞마을 이 씨……. 언제나 웃음으로 마주하면서 막걸리 잔 함께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정겨움들 속에서 마당 텃밭의 푸성귀들이 앙증스럽게 싹을 틔우고 자라면서 싱그러운 식탁을 꾸며준다. 석류나무며 매실나무, 앵두나무가 제 꽃 제 잎을 잘 피워나간다.

오늘 뽑혀 나간 반송을 보면서 간절한 바람을 품는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 뒤에까지도 지금처럼 내 생애를 점철해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지금의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저들이 나에게로 오기를 마다하지 않듯이 나도 저들과 기꺼이, 고마운 마음으로 하나 되어 사는 것이다. 영원한 내 살 자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나무가 심어졌다. 이 나무를 보면서 다시 기원을 모은다. 이제는 내 작은 정원이 저의 참으로 즐겁고 자유로운 삶의 터가 되기를, 나와 함께 살아나갈 긴요한 삶의 자리, 제 살 자리가 되기를-.(201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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