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못밥 자시러 오소

이청산 2012. 5. 21. 17:13

못밥 자시러 오소
-청우헌 일기·17


점심나절에 못밥을 먹으러 오라고 조 씨네 집에서 기별이 왔다. 논들에는 어제 그제 조 씨 집보다 먼저 모내기를 한 집이 있긴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조 씨가 처음이다. 집에서 육묘상에 기른 모라서 다른 모보다 빨리 흙 맛을 보여주어야 한단다. 조 씨 집에 대여섯 이웃이 모였다. 갖은 봄나물에 돼지고기를 볶아놓고 이웃이 잡아온 물고기로 매운탕도 끓여 놓았다. 어느 이웃은 손수 빚은 술을 들고 왔다. 오늘의 상손님은 이앙기 주인 김 씨다.

수고했습니다. , 한 잔씩 합시다!”

조 씨가 권하는 술잔에 풍년 발원을 담아 함께 잔을 들었다.

옛날 같으면 모 찌는 사람, 심는 사람, 못줄 대는 사람 모두 울력으로 모여 모내기노래라도 불러가며 들판을 북적거리다가 때가 되면 논머리에 둘러 앉아 못밥을 맛있게 나누어 먹을 일이련만, 요즈음은 그럴 일이 없다.

이앙기 한 대만 하면 웬만큼 너른 논이라도 한 나절이면 다 심어버린다. 모탑재대에 모를 싣고 논바닥을 쓸 듯이 달려 나가면 갈퀴 달린 플로트가 모를 찍어내어 줄 맞추어 가지런히 심어나간다. 탑재대는 좌우로 움직이며 모가 고르게 찍혀 나가면서 여러 줄을 이루도록 한다. 논주인은 이앙기에 모판을 실어주기만 하면 된다. 중도에 모가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보조탑재대에도 모판 몇 개를 실어 놓는다. 기계 부리는 사람은 탑재대에 모가 떨어졌다는 신호음이 울릴 때까지 페달을 밟으며 이앙기를 부려 나간다.

기계가 차지하는 몇 뼘 자투리를 남기고는 한나절이 못되어 몇 마지기 모내기가 훌쩍 끝났다. 수로에 손을 씻고 집으로 모였다. 일꾼은 이앙기 주인과 논주인 둘 뿐이지만 객군들이 더 많다.

거든 것도 없이 밥만 먹자니, 밥이 잘 넘어갈까. 하하하!”

거들 일이 있어야 거들지!”

못밥을 언제 일한 사람끼리만 먹었나!”

말소리에도, 웃음소리에도 후덕한 흙냄새가 묻어났다. 막걸리 잔이 순배를 돌았다.

소 부려 농사짓던 옛날의 시골이 아니다. 많은 이 달려들어 품앗이로 짓는 농사가 아니다. 객토하고, 갈고, 고르고, 거름 주고, 물대어 삶고, 모를 심는 모든 일들을 기계로 다 해낸다. 그뿐만 아니다. 모판에 볍씨를 담아 못자리를 만들 때도 기계가 하고, 모가 나락이 되어 자라갈 때 농약을 치는 일이며, 다 자라 벼를 베고 탈곡할 때도 기계가 한다. 논주인은 때맞추어 기계를 부르고, 시시로 물꼬만 돌보면 된다.

애써 농사지어 기계한테 다 받치는 것 아니냐는 푸념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참 편리한 세상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모든 일이 기계화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 농촌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바꾸면서 사람과 소가 일하던 자리에 기계가 들어앉게 된 세월이 반백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 역사 속에서 농사 기계도 기술도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농사를 짓는 도구와 방식도 달라지고 삶의 방법도 풍속도 많이 달라졌다. 이웃끼리 서로 도와 울력으로 해내던 일들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웃 간의 정도 예전 같지 않고, 인심도 옛날과는 다르다고 많이 느끼기도 하고, 그런 말들도 많이 한다. 시대와 생활 방식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천일 것이다. 누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으랴.

그래도 이 한촌 인심은 그리 기계화되지 않은가 보다. 마을 사람 인정이 기계 속으로 그리 많이 빨려 들어가지 않은가 보다. 아직도 이렇게 못밥을 나누어 먹고 있지 않은가. 그뿐 아니다. 모판에 흙을 넣어 볍씨를 뿌릴 때며, 못자리를 모을 때는 뉘 집 일 가릴 것 없이 한데 힘을 모은다. 들일을 하다가 새참이라도 들 때는 이웃 들녘에 뉘 없는지 살핀다.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그런 나눔이야 어찌 들일에서 만이랴. 모처럼 장에 가서 고기 근이라도 끊어오거나 귀한 산나물이라도 뜯어오면 나누어 먹을 이웃 챙기기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제 성 씨는 누구한테 얻은 옻나무로 옻닭을 고아 놓고 이웃을 부르기도 했다.

별일 없어도 서로 나누며 사는 사람들이거늘, 한 해 농사의 새 출발을 알리는 오늘 같은 모내기 날, 어찌 밥 한 술, 술 한 잔 서로 나누며 풍작을 빌지 못할까.

손 모아 한 땀 한 땀 심어나가던 옛날 모내기야 사라졌지만, 마음 모은 못밥 인심이야 사라질 일 있을까.

내일은 이 씨네 논에서 모내기를 할 것이라 한다.

오천댁 정어린 목소리가 벌써 논배미를 감돌고 있는 듯하다.

못밥 자시러 오소!”(2012.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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