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촌의 한봄

이청산 2012. 4. 18. 23:06

한촌의 한봄


강둑에 벚꽃이 활짝 피던 날, 논들 수로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올해 첫 통수라고 수로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며칠 전부터 남쪽의 꽃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지만, 한촌엔 벚나무 가지가 볼그레한 빛이 조금 감돌뿐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이곳 봄은 남녘보다 좀 늦은 줄 알면서도 논들엔 일손들이 점점 바빠져 갔다. 벼 그루터기가 검은 흙을 지키고 있던 들판을 트랙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흙의 속살이 드러났다.

논둑의 민들레며 제비꽃이 수줍은 듯 꽃을 사근사근 피워내고, 산자락 나뭇가지들에서는 햇잎들이 긴 잠에서 비로소 깨어난 듯 배시시 눈을 틔우고. 일찌감치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소식을 전해주던 생강나무에는 노란 꽃이 흐드러졌다.

다시 트랙터가 논들을 누비면서 흙의 속살들을 부드럽게 매만져 나가면서 지력을 돋우기 위한 거름이 논바닥에 널브러졌다. 어느 집 논들에는 기다랗게 골을 지워 까만 비닐을 덮어씌우고 실낱 같은 묘목을 심어 나갔다. 올해는 작목을 바꾸어 사과나무 묘목을 키워볼 것이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저녁으로 산산하게 불던 살바람이 명지바람에 밀려 나는가 싶더니, 농익은 햇살이 등짝 위로 따끈하게 내려앉았다. 이튿날 아침 강둑에는 무슨 반란 같은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깨알 같은 봉오리만 종종 달고 있던 강둑의 벚나무들이 우렁찬 하모니로 합창이라도 하듯 일제히 꽃을 피워냈다. 강둑의 꽃은 물속에서도 활짝 피어났다. 강물은 만발한 꽃을 실은 채 봇둑을 타넘으며 유유히 흘러갔다.

이제야 봄 같네!”

이장은 강기슭 물문으로 달려갔다. 겨우내 막아 두었던 문을 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물은 앞을 다투어 논들 수로를 향해 치달아 나갔다. 물은 수로를 타고 함성이라도 지르듯이 콸콸콸 솨르르르 흘러갔다.

봄철 나무가 줄기를 타고 이리저리 새 가지를 뻗듯 물은 수로를 타고 흐르면서 이쪽저쪽 논배미로 흘러 들어갔다. 맑고 낭랑한 물소리는 우우욱, 뱃쫑. 휘이익, 재재잘 온갖 새소리와 화음을 맞추며 거침없이 흘러갔다.

오늘 같은 날, 그냥 넘길 수 없잖아! 통수를 기념해야지!”

몇 사람이 어느 집 평상 위에 둘러앉았다. 마침 횟 거리를 장만해다 놓은 게 좀 있다며 발갛게 무쳐 안주로 내놓았다. 유채며 달래 푸른 잎사귀도 쌈으로 내었다. 막걸리가 하얗게 잔을 넘쳤다.

풍년을 위하여!” 모두들 잔을 들었다.

모판을 설치할 일, 못자리를 만들 일, 비료를 넣을 일들에 대한 분분한 이야기가 안주거리를 보탰다. 해마다 하는 일이건만 할 때마다 새로운 일이다. 모두 기계로 하는 일이라, 농사 지어 기계한테 다 바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이야기는 시속 일로 옮겨갔다. 이번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시장, 딴눈 팔지 말고 농민들 좀 잘 살게 해주면 좋겠네. 누구는 이 골짝에도 도시가스 넣어준다고 했다며? 언제 그렇게 되겠어? 그래도 총선은 다행이여, 저쪽 사람들 풀 좀 죽게 됐잖아! 몰라, 이쪽이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 얼마나 잘 살게 해줄지.

그런 사람 그런 일하고 농사짓는 사람 농사나 짓자고, 저 꽃 좀 봐, 얼매나 좋노!”

점점 불콰해져 가는 얼굴빛과 함께 해거름 햇살을 받은 강둑의 벚꽃이 불그레한 빛을 더해 갔다. 수로를 흘러가는 물은 시나브로 논들을 적셔가고 논가의 수양버들이 물을 반기는 듯 파란빛을 날리며 하늘거리고 있었다.

망두걸 철도 머잖네!”

망두걸은 고샅 어귀 가로등 밑의 논들머리 빈터다. 수로에 물이 흐르고 개구리가 울기 시작할 즈음부터 해질녘이면 할매들이 모여 앉아 밤마실을 즐기는 곳이다. 누구네에서는 전을 내오고, 누구네에서는 과일을 내오기도 하면서 할매들의 놀이판은 인정의 꽃이 흐드러지기도 한다. 이제 곧 어우러질 모판과 함께 할매들의 밤마실 판이 어우러지면서 한촌의 한봄은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넉넉히 흐르는 수로의 물은 저 논들로, 한촌사람들 마음속으로 꽃 흐드러지는 한촌의 한봄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201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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