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명지바람 타고 오는 봄

이청산 2012. 3. 19. 07:29

명지바람 타고 오는 봄


성 씨의 연구실이 문을 열었다. 우리는 성 씨의 작업장을 연구실이라 부른다. 성 씨의 연구실에는 여러 가지 것들을 짜고 만들기 위한 각종 공구며 장비들이 즐비하다. 그것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술을 빚기 위한 양조 도구며 술통들이다.

성 씨는 손재주가 좋아 나무로 무엇을 잘 만들기도 하지만, 술을 빚는 일을 더 잘한다. 퇴임 전까지 식품품질관리에 관해 연구하는 일을 했던 성 씨는 발효에 대한 지식도 상당하여 곡식이 술이 되는 과정을 관찰하며 술의 맛과 도수와 빛깔의 변화에 대해 궁리하기를 좋아한다.

성 씨가 만든 술은 모두 이웃들과 함께 나눈다. 술 빚는 일은 그의 취미생활인 동시에 이웃과의 나눔을 위한 일이다. 그래서 성 씨 연구실은 이따금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이 된다. 그 때마다 연구실에는 술맛도 흐드러지지만,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로 이야기꽃이 만발해진다.

지난겨울 동안엔 별로 모여 앉지를 못했다. 추위를 피하여 간혹 누구네 집에서 성 씨의 술로 자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연구실보다는 만만치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추위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성 씨가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가을에 구해 놓은 나무로 누구에게 선사할 탁자를 짠다고 했다. 술통을 말끔히 손질하고 지에밥을 쪘다. 그리고 연구실에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오랜만이다. 지난겨울 동안 술맛이 많이 들었다. 잔이 돌았다. 논에 거름을 넣고 사과나무 전지할 일들로 이야기들이 분분해진다.

한촌에 봄이 그렇게 오고 있었다.

마당가에 서있는 목련나무에 움이 트고, 매실나무에도 파란빛이 감돈다. 밭둑의 냉이가 제법 파란색을 돋우고, 시냇가에 버들개지가 손톱 털북숭이를 달았다. 산길의 생강나무에도 좁쌀 같은 노란 망울이 맺히고, 뭇 새들의 소리가 한결 명랑하게 피어난다.

비가 옷자락을 적실 듯 말 듯 소리 없이 내린다. 겨우내 얼어붙어있던 땅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다. 텃밭에서 겨울을 지낸 유채며 얼갈이배추가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조금씩 편다.

아내가 호미를 들고 나섰다. 텃밭에다 마늘씨를 묻었다. 순이 나면 잘라먹을 거라 한다. 어린 파도 옮겨 심었다. 텃밭이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들판에 발자국이며 바퀴자국이 찍히기 시작한다. 엊그제는 커다란 트럭이 와서 흙을 부어대더니, 오늘은 트랙터가 굉음을 내며 흙을 뒤집고 있다. 트랙터 위로 명지바람이 스쳐간다.

산골짝에 조금씩 보이던 잔설이 모두 사라지고 맑은 물이 도랑을 흘러내린다. 노래를 부르듯 조잘거리며 흐르는 물은 마을 앞 시내로 든다. 시냇물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강둑의 벚나무가 시나브로 눈을 떠간다.

봄을 바라보는 눈길이야 예와 지금이 다를까. 옛 시인의 목소리가 낭랑히 들려오는 듯하다.

 

봄비 보슬보슬 방울지지 않더니       春雨細不滴

밤 되자 은은한 소리 들리네.           夜中微有聲

눈 녹아 앞 시냇물 불어날 테고        雪盡南溪漲

풀싹들도 파릇파릇 돋아나겠지        多少草芽生

                  -,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차갑고 추웠던 겨울이 갔다. 눈 녹아 앞 시냇물이 붓듯. 풀싹이 파릇파릇 돋듯 올봄엔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것도 같다. 텃밭도 다시 갈아야 하고, 오랜만에 다시 서게 된 강단에서 봄 같은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 좋은 글도 몇 편쯤 써보고 싶다.

다시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 아마 그럴 거야.”(몽해 항로6-탁란, 장석주)

아마 그럴 것 같다. 언제 일지는 몰라도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일들이 늦게라도 느지막이라도 올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명지바람을 타고 들려올 것 같다.

성 씨가 연구실로 오란다. 다 짠 탁자를 구경하란다. 그리고 술이 잘 익었단다. 봄이 익진 않았는가.(201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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