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4월의 기억

이청산 2012. 5. 7. 22:36

4월의 기억


4월은 반란처럼 왔다. 그리고 진압된 반란처럼 가버렸다.

4월 어느 날 아침 마을 앞 강둑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말았다. 낌새가 보이긴 하길래 곧 무슨

일이 벌어지려니 하고 짐작은 했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일이 터질 줄은 몰랐다.

바람살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강둑의 벚나무 가지에 녹두알 같은 봉오리들이 송송 맺혔다. 남녘에서는 벌써 화신이 전해 오던 터라 이 한촌의 꽃소식도 멀지 않을 것이라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불현듯 반란처럼 터져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반란이었다. 꽃으로 일으키는 순정한 반란이었다. 겨우내 인고하며 채비해 왔던 은밀한 속내를 일시에 화산처럼 터뜨려내는 열정의 반란이었다. 강둑에서만이 아니었다. 강물에 얼굴을 씻고 있던 산자락에서도 엄청난 반란이 일어났다.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벚꽃, 살구꽃, 복사꽃-. 희고 붉고 노란 꽃빛에 연두, 초록의 빛깔들이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툭툭 찍어놓은 수채화의 물감처럼 무덕무덕 그려지고 칠갑해져 있었다. 화관을 이루고 있는 우듬지들이 때로는 융합하고 때로는 분열하면서 갖가지 색채를 연출해 낸다. 어느 화가의 붓끝인들 저 빛깔 저 모양을 그리고 다듬어 낼 수 있을까.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일러스트인들 저리 황홀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을까. 색채의 반란이요, 장식의 혁명이었다.

꽃이 한창 흐드러져 가던 며칠 뒤의 어느 날 비가 내리고 강물 흐르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 갔다. 밤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채 잎이 돋지 않은 감나무 가지가 쇠바람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침이 밝았다. 비가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고 맑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 현란으로 눈부셨던 그것들이, 순정으로 속을 뒤집던 그것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강둑의 나뭇가지에는 어쩌다 하나씩 남은 꽃잎들이 찬란했던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반추하고 있을 뿐이었다.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반란군들은 낙화가 되어 강둑을 소로시 물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산꽃들은 그래도 저희들끼리 무덕무덕 모여서서 결은 행렬이 강둑보다는 조금 더 공고했던지 며칠은 더 버텼다. 빛깔이 빛깔을 만들어내는 현란을 며칠은 더 연출해냈다. 그러나 결국은 진격해 오는 푸른 진압군에게 시나브로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진압군들은 강둑에서부터 들판을 거쳐 산으로 올라오며 붉고 희고 노란 빛깔들을 하나하나 접수해 나가더니 강둑이며 산을 온통 저들의 푸른 제복 빛깔로 물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4월이 갔다.

반란군으로 온 4월은 진압군을 남겨놓고 갔다. 4월의 반란군은 모든 걸 뒤집어 흔들긴 했지만 그리운 반란이었다. 찬란한 빛깔로 몽환의 아름다움에 젖게도 하고, 그 무엇을 향한, 그 누구를 향한 그리움에 젖게도 했다.

그리고 진압군이 왔다. 달뜬 가슴 위로 푸른 진압군이 왔다. 으레 올 줄 알았던 것처럼 반란군은 순순히 자리를 내주었다. 사이좋은 반란군과 진압군이라 할까. 이들은 원래 한 통속이었던지도 모르겠다.

진압군은 새뜻하고 싱그러운 빛깔로 산하를 물들여가면서, 4월의 그 아름다움과 그리움에 전율을 일으켰던 가슴들을 쓰다듬어 나갔다. 그 가슴에 싱그러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희망의 빛깔을 뿌려주었다.

세상이 아름다운 반란군과 싱그러운 진압군의 4월 같았으면 좋겠다. 한때는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떨게 했다가 청량한 빛깔과 싱싱한 향기로 가슴을 씻어주는 4월 같았으면 좋겠다.

서로 피 흘려 싸우기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나락에 빠질 때까지 진흙탕 싸움에 매몰하는 세상이 아니라, 4월 같은 찬란한 반란과 의좋은 진압의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세상 속에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싹이 되어 꽃 피우고 잎 돋우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4월은 찬란하고 의좋은 반란과 진압의 기억을 남겨 놓고 갔다.

그리고 5월이 왔다. 푸른 평화의 진압군 세상이 왔다.

참 좋은 당신의 세상이다.(20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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