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승민의 첫돌

이청산 2012. 4. 12. 21:04

승민의 첫돌


승민이가 첫돌을 맞던 날, 주지봉에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올해는 꽃이 좀 늦게 핀다 싶더니 승민이의 돌맞이를 기다려 준 것 같다.

서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승민이가 태어난 지 백일 되던 날은 할아비 할미가 있는 곳으로 와서 기렸는데, 돌날은 저희 집에서 기리기로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길섶에는 개나리가 먼저 봄을 알리고 있었다. 개나리는 희망의 꽃이라 했던가. 군데군데 무덕무덕 노란 개나리가 축복처럼 산야를 물들이고 있었다.

저희들 집에 닿았다. 승민이와 제 언니 승윤이는 저들끼리 잘 놀고 있고 제 아비어미는 잔치 준비에 분주했다. 오랜만에 할아비 할미가 왔다고 모두 함께 엎드려 절을 하는데, 승민이는 말똥 쳐다보기만 하는 모습이 외려 귀엽기 짝이 없다.

제 위와 다섯 살 터울로, 고대한 끝에 태어난 아이라 더욱 귀애스러워 보인다. 기다려 얻은 아이라 그런지 어린 것이 음전하기가 철 다든 아이 같다. 눕혀 놓아도, 탈것을 태워놓아도, 안아주어도 그저 놀기만 잘 한다. 어쩌다 배가 고픈 듯, 편치 않은 곳이라도 있는 듯 칭얼댈 때도 있다지만. 그것도 잠시, 제 뜻을 알아주기만 하면 이내 그쳐 버린단다.

외가 식구들이 오고 가까이 사는 친척 몇 집이 왔다. 모두들 한 번씩 승민이를 안아주면서, 참 예쁘고 귀엽고 천연덕스럽기도 하다며 덕담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는 무슨 음식점이며 예식시설을 빌려 시끌벅적하게 돌을 기려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 아비어미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소담하게 차려주고 싶다며 바쁜 손을 놀리고 있다. 상차림을 위한 장식품을 대여해 주는 곳에 가서 몇 가지를 빌려 왔다. 케이크와 꽃 모양의 장식, 물을 담아 촛불을 띄우는 유리잔과 벽에 붙이는 축하 휘장이다. 그 휘장에 이승민 첫돌기념이라 써 붙였다. 차려 놓으니 상이 제법 그럴싸하다. 굳이 이리 장식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제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라 생각하니 상이 한층 예쁘고 빛나 보이기도 했다.

그 장식품들 사이사이에 오방색 갖은 과일이며 탈 없이 튼튼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수수팥떡이며 무지개떡을 놓았다. 상이 다 차려지자 제 할미는 밥과 미역국에 정한수를 따로 한 상 차려 놓고 삼신할미를 향해 건강하고 지혜롭게 잘 자랄 수 있기를 손 모아 빌었다.

새로 마련한 꼬까옷을 입힌 승민이를 상 앞에 앉혀놓고 다시 무럭무럭 튼튼하게 잘 자라거라!’하고 축원을 모으면서 돌잡이를 시켰다. 상 위에 실패며 돈, , 연필, 마우스 들을 얹어 놓았는데, 손을 이리저리 젓더니 연필을 덥석 잡는다. “, 승민이 공부 잘하겠네! 학자 되겠네!” 하며 모두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저에게도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조그만 입을 벌려 웃는다.

제 아비어미가 먼저 안고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은 할아비 할미,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안고 찍고, 승민이를 중심으로 모두 함께 둘러 앉아 돌을 기려두기 위한 사진을 찍었다. 다시 한 번 손뼉을 모아 승민이가 잘 자라기를 빌어주었다.

돌상을 내리고 상을 다시 차려 함께 둘러앉아 뒤풀이를 즐기려는데, 자동차 소리와 확성기 소리가 뒤섞인 소음이 창밖에서 귀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언뜻 들으니 선거 유세하는 소리 같았다. 누가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이곳이 그 말썽 많은 후보가 출마한 곳이구나.“ 온갖 쌍스러운 말들이며 노인을 비하하는 막말을 해댔다는 그 사람이 무슨 당의 공천을 받아 나선 곳이라고 한다. 그런 패륜적인 언동에도 불구하고, 상대 당에 대한 비판적인 이념이 같다고 후보로 내세워 저렇게 유세를 해대게 하는 모양이다. “에이, 오늘 같이 좋은 날, 저런 소리가 들려올게 뭐야!”. “세상이 어찌 되려고 저런 사람이……”.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저런 사람들이 설치는 세상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얼 배울 수가 있을까. 맹자 어머니처럼 집이라도 옮겨야 되지 않을까 모르겠네. 저런 사람이 사는 곳에 살고 있다니! 모두들 웃었다. 그런 사람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승민이를 향해 손뼉을 치면서 환하게 웃었다. 맑고 밝고 튼튼하고 슬기롭게 자라기를 바라는 축원의 웃음이었다. 승민아, 너는 정말 착하고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해!

연필을 집는 거 봐! 승민이는 세상을 빛낼 훌륭한 학자가 될 거야!”

할미에게 안긴 승민이는 저도 무얼 아는 듯 조막손을 벌려 짝짜꿍을 하면서 방실방실 웃는다. 웃는 그 모습이 지금 산에 들에 한창 피어나고 있는 봄꽃과도 같다.

다음날 제 아비어미 그리고 승윤이, 승민이가 흔드는 손을 뒤로 하며 서울을 떠나왔다. 산이 있고 물이 흐르고, 새소리 바람소리가 맑은 삶의 터로 돌아왔다.

개나리가 피어있는 고샅을 지나 생강나무꽃이 만발한 산길을 따라 주지봉에 올랐더니 볼그레한 승민이 얼굴빛 같은 사랑의 꽃 진달래가 활짝 피어있었다. 어디서 해맑은 새소리가 뱃쫑뱃쫑 재잘재잘 들려왔다.

승민아! 할아비 할미가 사는 곳에 놀러오렴, 새소리도 듣고, 꽃도 보고……(201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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