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도시에서의 5일간

이청산 2012. 3. 29. 14:44

도시에서의 5일간


……이제 한 쌍의 비익조가 되어 희망찬 새 인생을 출발하는 두 사람에게 앞으로 더욱 값진 인생을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몇 가지 당부를……

신랑은 멋지고 신부는 아름다웠다. 앞에 선 싱그러운 젊은이들을 향해 내 지난 삶에서 느끼고 겪은 일들을 되새기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잘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모처럼 지난날의 삶을 묻었던 도시를 향해 달려간다. 이따금 도시를 찾아 가긴 하지만 이번 길은 대엿새쯤은 걸려야 할 것 같다.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달과 별을 보면서 살고 싶어 한촌을 찾아와 살고 있지만, 사람들과 얽혀있는 관계며 인연들을 모른 체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생애를 마감하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고 많은 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나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인연이며, 정리할 수 없는 관계가 없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해야 하고, 좋아하는 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길을 돋우었다.

먼저 일주일에 한 번씩 서야 하는 강단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일주일 내내 마음 써 준비한 것들을 젊은이들에게 즐겁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지성스런 눈동자가 나를 즐겁게 했고, 가난한 지식이긴 하지만 후진들과 나누어가질 수 있다는 것이 또한 나를 즐겁게 했다.

길을 나선 김에 기억을 뜻있게 장식할 시간도 가져 보고 싶었다. 약속한 친구를 만났다. 우리나라 문단의 거목이었던 시인과 소설가의 문학관이 함께 있는 시로 달렸다. 유서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문학관에 이르렀다. 동향 출신의 문학인이라고 생애와 업적을 함께 기리고 있었다. 그들의 족적을 더듬으며 문학의 향취에 취하고 친구의 정에 젖는 사이에 날이 저물어 갔다.

한촌 살이를 떠나면서 비워두었던 도시의 집을 찾았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회색 빌딩과 엘리베이터가 먼저 맞이했다. 오래 비워두어도 도시가스 보일러가 잘 돌아가 주는 것이 고맙다. 새소리 대신 거친 기계음들이 아침을 알려 주었다.

모처럼 나온 도시에서 2년마다 한 번씩 받는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아침을 거르고 속을 비워 병원으로 갔다. 신체의 각 부위를 검진했다.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위염 증상이 조금 있다고 했다. 한촌 정다운 이웃들과 술잔을 자주 나눈 탓인가.

저녁엔 석 달 만에 한 번씩 모이는 계원들과 만났다. 도시에서 살 때의 이웃들이다. 모두 나처럼 한 생애를 마감하고 또 한 생애를 살고 있다. 어떻게 사느냐고, 사는 재미가 어떠냐고 서로 묻고 답했다. 누구는 스포츠댄스를 배우러 다니고, 누구는 여행을 즐긴다며 나의 한촌 살이를 궁금해 했다. 정겨운 자연이며 다정한 이웃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뿐이라고 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슥한 밤 속으로 헤어졌다.

다음 날 저녁은 낭송가협회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낭송 소리꾼들과 만났다. 감동 서린 시들을 정감 있는 목소리로 풀어냈다. 아름다운 작업이었다. 시가 삶을 아름답게 한다는 사실이 가슴에 소로시 새겨졌다. 시낭송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참 행복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다시 깊이 들었다. 그 소리꾼들과 두 달 뒤를 기약하며 헤어질 때도 읊조리던 시들은 귓속에 고스란히 남아 이명처럼 울리고 있었다.

다시 하루를 기다려 문학회 사람들과 만났다. 20여 년을 함께 한 동인들이다. 이번 모임은 어느 유력 회원의 주선으로 재벌 회사 복지관의 한 아담한 방에서 이루어졌다. 삼십여 명의 동인들이 모였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것인가를 논하고, 시를 낭독하고 수필을 읽으면서 서로 느낀 것, 생각한 것들을 나누었다. 만찬으로 잘 차린 코스요리가 나왔다. 자리를 주선한 분에게 박수를 보내며 맛있게 먹으면서도 문학을 이토록 화려하게(?) 즐겨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와인 향기가 식탁을 감돌았지만, 내일을 생각하며 눈으로만 음미했다.

다음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동문의 후배 자제가 혼인을 하는데, 나에게 주례를 청해 왔다. 더 훌륭한 사람을 모시라며 완곡히 사양했지만, 꼭 부탁한다기에 그 신뢰를 뿌리칠 수 없어 맡기로 했다. 혹 실행이라도 있을까 저어하여 한 시간쯤 일찍 예식장으로 갔다. 하객들이 모여 들었다. 신랑과 신부가 내 앞에 섰다. 설레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설렘이 바로 이들의 꿈이요, 사랑이요, 희망이요, 정열에 다름 아니리라.

서로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묘방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존중과 배려와 관용 속에서 사랑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좋은 가정을 이루야 할 것임을 말했다. 오늘 같이 설레는 날, 무슨 말인들 잘 들릴까 싶어 행진해 나아가는 신랑 신부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례사를 성혼선언문 안에 살짝 넣어두고 단상을 내려왔다.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 밤, 외진 시골에서 적요히 살고 있는 우리 부부를 위해 저녁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동서네와 만났다. 여인들이 자매의 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남정네는 도시와 한촌의 삶에 대해서, 남은 세월을 살아가야 할 일에 대해서 담소하며 소주잔을 비웠다. 시끌벅적한 취객들의 고성 속으로 도시의 밤이 깊어 갔다.

5일간이나 도시에서 머물렀던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시 도시를 떠나왔다. 도시에는 사람도 많고, 얽힌 인연도 많았다. 그 인연 속에 서려 있는 정도 사랑도 아름다웠다. 도시가 안고 있는 화려함도 눈부시고 편리함도 좋았다. 저마다의 발길을 태운 차들이 잘들 달리고, 밤 불빛도 밝았다. 싱그러운 젊은이들을 보는 일도 생기로웠고, 새롭게 짝이 되어 새 삶을 살려하는 꿈을 보듬어주는 일도 즐거웠다.

그런 도시가 좋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새소리 바람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들려오는, 생강나무며 산수유 노란 꽃이 피고 있는, 잔잔히 흐르는 냇물이며 그 위를 흰 두루미가 날고 있는, 텃밭에서 겨울을 견뎌낸 얼갈이배추가 다소곳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또 뉘 집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거나 회관에 모여 함께 밥을 지어먹는 연로한 마을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서정과 순수 속에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한촌으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달려가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20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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