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봄·캠퍼스

이청산 2012. 3. 11. 08:41

봄·캠퍼스


출석은 카드가 다 체크해 주기 때문에 부를 필요가 없군요. 그래도 이름은 알아야겠지요? 대답하면서 손을 한번 들어봐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나갔다. 손을 들면서 대답하는 얼굴들이 모두 봄이었다. 모두들 화사하게 피어나 있었다. 강의실은 봄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교단에 섰다. 학생들과 수업 시간을 함께 하기가 실로 얼마만이던가. 오랜 객지 생활 끝에 귀향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낯선 고향이다. 이렇게 큰 사람들과 함께 하기는 또 얼마만이던가. 이 큰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십 수년 전의 가물거리는 기억이 봄날 움처럼 뇌리를 비집고 나온다.

한 생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찾아 든 한촌에 해가 바뀌는 세월이 감겨가던 지난겨울 어느 날, 불현듯 서 교수님의 전화를 받았다. 서 교수님도 그 십 수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신 것 같았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산에나 오르고, 책 조금씩 읽고 하지요.”

읽으신 책 학생들에게 좀 들려주시지요.”

신학기에 강좌를 하나 맡아 달라는 말씀이다. 너무 당황스런 제의였다. 새소리 바람소리 속에서 텃밭 푸성귀나 뜯으며 사는 처지에 무슨 강의라니-. 그럴 능력이 없다며 완곡하게 사양했지만, 그간의 경륜만 들려주어도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꼭 부탁드린다고 했다. 강권을 못 이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교직실무라는 과목을 맡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했다. 보잘것없는 경험이나마 후진들에게 잘잘못을 모두 전하여 거울로 삼게 하는 것도 먼저 세상을 산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서 교수님께 전화하여 맡아 보겠다고 했다. 기뻐하셨다.

교직실무-, 교직의 실제적인 일, 말하자면 교직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 그리고 실행에 필요한 안목과 방법을 이야기하는 과목이겠다. 지난 경험들을 반추해 보기도 하고, 몇 권의 관련 서적을 섭렵하면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을 기다렸다.

새로운 공부였다. 우선 토막토막 나있는 경험들을 모아 질서를 잡아 배열해 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학자들의 전문지식을 빌어 와 경험을 재구성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 빈한한 터라 쉽지는 아니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움은 없지 않았다.

집 나간 아이가 집을 찾아들 듯.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던 옛일들이 새록새록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 즐거웠고, 무언가 할 일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물오르는 나뭇가지처럼 생기를 느끼게 했다. 영원히 결별했다고 생각했던 교단이 다시 나에게로 오고 있다는 것에도 마음이 설레었다.

겨울이 긴 꼬리를 접어가면서 봄의 달 삼월이 왔다. 인디언들은 삼월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이라 했다던가. 마당에 서 있는 마른 목련과 라일락이 앙증맞은 눈을 달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도 새로운 무엇이 뾰족이 솟아나오는 듯했다.

그 삼월 초 어느 날, 모처럼 면도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길을 돋우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 국도를 지나고 고속도로를 달려 캠퍼스에 닿았다. 빛 맑은 활기가 캠퍼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강의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쁜 첫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십여 명의 맑고 싱그러운 봄들이 눈길을 모두 한데 모아 왔다. 내 젊은 시절도 저 봄과 같았을까. 까마득한 캠퍼스의 추억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갔다.

, 반갑습니다. ‘교직실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내 소개를 겸해서 지난 교직 생애를 간추려 볼까 합니다. ‘교직실무 엿보기로 삼아주기 바라면서………

근 사십 년에 이르는 교직 평생을 실무를 중심으로 하여 파노라마로 엮어갔다. 찬란했던 생애도 아니면서 큰일이나 한 것처럼 펼쳐내기가 민망하고 쑥스럽기도 했지만, 맑은 봄들은 호기심에 찬 듯 모두들 눈과 귀를 또렷이 모아주었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메모를 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매듭지을 때 봄들은 손뼉을 모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교직실무란?…….” 이론적인 면보다는 그야말로 실무적인 면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경험을 반추해나갔다. 심오한 이론들은 전문 학자들에게서 배웠고,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냉정한 수직적인 관계를 이루는 조직이라고 한다면, 학교는 따뜻한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는 조직이라 할 수 있지요…….”

사랑으로 살아야 할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나을 것이 아닌가. 봄들의 눈과 귀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는 듯했다.

그 봄들을 향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내 혈관 속으로도 생기로운 봄의 물이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의 캠퍼스에서-.(20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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