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청산 2012. 2. 18. 15:42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제 여러분들은 모교가 추구하는 정신인 그 'I'를 껴안고 더 넓고 큰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더 큰 인생의 배를 띄우는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은 교표 'I'에 담긴 Identity(정체성 확립), Impression(감동 교육), International(국제적 인재육성)이라는 상징성을 이야기하며 졸업생들을 향해 회고사를 하고 있었다.

1년 전 바로 오늘, 나는 저 단상에서 죄를 지어 후회스런 세월[罪悔之年]'이라며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나무란 정약용(丁若鏞)의 말을 인용하며 퇴임사를 했었다. 목이 잠겨 말이 잠시 끊어지기도 했었다. 오늘 교장선생님의 목소리는 졸업생들의 사기와 의지를 한층 드높일 듯 우렁찼다.

나는 그 퇴임사를 뒤로 하고 한 생애를 닫았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문을 열면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궁벽한 한촌을 찾아 새 터전을 잡았다. 그 삶이 한 해를 채워가던 어느 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데, 지난날을 함께 했던 교감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오는 16일 졸업식을 하는데요, 교장선생님께서 자율형 공립고를 만들어 놓으시고 첫 졸업식 아입니까? 꼭 좀 참석해 주시이소.”

제가 뭘, 이제 떠난 사람인데…….”

형편을 봐서 어떻게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작은 갈등이 가슴속에 파문을 그리면서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로 머릿속을 스쳐갔다.

학교가 규모는 컸지만 지역적인 특성 때문인지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지, 어찌하면 좀 괜찮은 학교로 만들 수 있을까, Vision(), Impression(감동), Passion(열정)을 슬로건으로 하여 V.I.P교육을 한 번 해보자며 선생님들과 의기를 모아가고 있던 중에, 마침 나라에서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는 자율형 공립고제도를 시행한다고 했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선생님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심과 궁리를 거듭했었지. ()을 짜서 들고 교육청은 물론 교육과학기술부까지도 마다않고 달려갔었지. 자치단체 지원금을 끌어내기 위해 젊은 시청 직원들과 씨름하던 일을 생각하면…….

마침내 자율형 공립고로 지정되고, 학교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나라와 지자체로부터 많은 지원금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교육과정 운영을 비롯해서 학사와 인사 면에서 다른 학교는 누릴 수 없는 혜택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학교의 발전을 위해 그러한 혜택은 참 다행스러운 것이었지만, 더욱 기뻤던 것은 선생님들과 함께 뜻을 모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일들이 어찌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던가. 그 때 우리들은 모두가 동지였다. ‘괜찮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뜻을 함께 한 정다운 동지들이었다. 그 뜻, 그 정을 한데 모아 나라로부터 자율형 공립고지정을 받아 놓고, 나는 밀려오는 세월을 등에 지고 학교를 물러났다.

그 시절이 그립다. 그렇게 마음을 모으고 뜻을 엮어 무언가를 해보자며 열정을 태우던 그 시절이-. 그러나 과거란,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려서 될 일도 아니다. 내 어느 시절, 지난 날 근무했던 학교와 그 지역사회가 너무 좋아 몇 년이 흐른 뒤에 자리를 바꾸어 다시 찾아 갔었다. 그러나 다시 간 그 학교와 그 사회는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기억만큼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안고 떠나와야 하지 않았던가. 첫사랑일수록 추억 속에 있을 때가 아름다운 것이거늘-.

이미 내가 떠나온 학교를 다시 찾아가는 일을 선뜻 내켜할 수가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하지 않는 게 있는가. 지난날이 아무리 그리운들, 지난날의 동료들과 아무리 다정했던들, 시간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한 지금 어찌 지난날과 같을 수 있을까.

졸업식 날은 다가오건만, 마음을 못 정하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꼭 좀 오셔야 합니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짐을 놓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뿌리칠 수 없어 얼떨결로 응낙하고 말았다

이른 아침을 먹고 길을 돋우었다. 길을 달려가면서도 지난날을 찾아 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 시간 여를 달려 학교에 닿았다. 문 앞에는 꽃 장사들이 진을 치고 있고, 졸업을 축하하고 학교를 자랑하는 현수막들이 현란하게 걸려 있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모든 선생님들이 일어섰다. 반가움으로 환영의 인사를 건네 왔다. 손들을 잡는 순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듯한 지난날의 온기가 느껴져 왔다. 교장선생님과도 감격의 인사를 나누었다.

교장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식장으로 함께 갔다. 졸업생과 축하객들이 강당을 메우고 있고, 무대에서는 아이들의 지난 일을 회고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이 번 졸업식도, 지난해 처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의식은 간략하게 줄이고 축제형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전면 현수막에는 축 졸업이라는 말 대신에 자율형 공립고 ㅇㅇ고등학교 제7회 졸업생 369명의 다짐이라며 모교의 이름을 걸고 더 큰 미래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겠습니다.”라고 새겨 놓았다.

내가 들어서자 아이들이 알아보고 환호를 했다.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빈석에 앉았다. 지난해는 주인의 자리에 앉았었지만, 오늘은 손님이 되어 내빈석에 앉아야 했다.

식이 시작되어 국민의례가 진행되고 학교장의 졸업장 수여와 상장 수여 순서가 이어졌다. 지난날 내가 그렇게 아이들에게 졸업장을 주고 상장을 주던 일들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져왔다. 교장선생님은 졸업장과 상장을 받은 아이들을 포옹해 주기도 했다. 나는 손은 잡아 주었지만 그렇게는 못했었다.

사회자는, 다음 순서로 감사패를 증정하는 순서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신 분께 드린다며, 문득 전 직함을 붙여 내 이름을 불렀다.

 

뭐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여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교감, 교장선생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고, 지난날이 그립기도 하여 왔을 뿐인데-. 사회자는 어서 올라오라며 독촉했다.

단상으로 올라가는데, 다시 한 번 박수가 터지고 함성이 울렸다. 나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 무대에서 주기만 했었다. 내가 무얼 받는 일이 도무지 나의 일 같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교장선생님은 단상 앞에서 패를 들고 서고, 사회자가 낭독을 했다.

……특히 본교를 자율형 공립고로 출범시킴으로써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명문고로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셨으므로 본교 제7회 졸업식에 즈음하여 존경과 감사의 뜻을 이 패에 담아 오래 기리고자…….”

패를 나에게 건네주었다함성과 박수가 터지고, 나는 교장선생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 올 때 또 다시 터지는 박수와 함성이 강당을 메웠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는 선생님도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은, 자율형 공립고의 기반을 다졌던 지난해를 도약대로 하여 더욱 힘찬 전진으로 자랑스러운 모교가 되게 할 것이며, 졸업생 여러분도 훌륭한 인재가 되어 모교를 빛나게 해 달라며 회고사를 이어나갔다.

학교장의 회고사로 의식이 끝나고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재학생 대표의 축시와 졸업생 대표의 답사에 이어, 한 해 동안 열심히 기량을 닦아온 노래패 소리샘, 춤 동아리 신무혼, 뮤직 그룹 캐치사운드의 축하 연주가 계속되었다. 연주하는 아이들도, 보고 듣는 아이들도 모두 신이 났다. 손뼉으로 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함께 부르기도 하는 사이에 졸업식이 끝났다.

축하합니다!”

내빈과 선생님들은 졸업생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축하의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고맙고 기쁘다고 했다. 실로 고맙고 기뻤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들이 바뀌고 변하였을 터인데도, 선생님들과 내가 함께 나누었던 마음들은 변하지 않고 지난날의 모습대로 남아 준 것이 고마웠다. 나에게 무슨 그리 큰 공이 있었을까만, 그 때의 정과 뜻을 에 새겨 준 것 같아 기뻤다.

오늘 내가 받은 감사패란 지난 시간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뜻을 모았던 그 시간들, 그리고 정 깊은 기억 속에서 곱게 반추된 시간이 감사패란 이름으로 나에게 온 것 같았다.

모든 의식이 끝났다. 언제 다시 새겨질지도 모를 시간들의 또 다른 이름을 기약하며 선생님들과 석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으로 헤어져 들었다.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꽃 장사들도 돌아가고, 졸업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하오의 익은 햇살을 받고 있었다.(201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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