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설날의 설렘

이청산 2012. 1. 25. 13:58

설날의 설렘


섣달 스무 여드렛날, 아들네 식구는 자정에 집을 나서 오고, 딸네 식구는 미명의 새벽을 달려 노친네가 사는 한촌에 이르렀다. 설레어서 설인가, 아비어미를 만나는 기쁨에 잠을 뿌리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오랜만에 슬하들을 만나는 설렘이야 늙은인들 다를까. 일찍 서둔 탓인지 다행히 길은 막히지 않더라고 했다. 여명도 채 비치기 전이라 우선 잠부터 재웠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이들은 그제야 아비어미를 만난 인사로 모두들 엎드려 절을 한다. 일곱 살에 드는 손녀며, 여섯 살에 드는 외손녀가 그동안 많이 컸다. 첫돌이 두어 달 남은 둘째 손녀가 더욱 또랑해진 것 같다. 가끔씩 아비어미를 찾아오긴 했지만, 남매 함께 오긴 오랜만이다. 올 때마다 어린 것들은 익은 봄에 새순 크듯 모습이 쑥쑥 달라진다.

오랜만에 피붙이가 다 모이니 집 안이 그득하다. 제 어미는 분주한 손놀림 속에서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저들끼리도 못 나누었던 정을 풀어내느라 이야기꽃을 피워내기에 바쁘다. 제일 즐거운 것은 저 어린 고종 자매간이다. 햇빛 본 날이 해 차이가 진다고 언니, 아우하며 술래잡기도 하고, 백지를 달래서 그림을 같이 그리기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무슨 놀이에 함께 빠지기도 한다.

제일 점잖은 것은 겨우 옹알이나 할 뿐인 어린 것이다. 저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리려는 듯 손짓 발짓을 해대기도 하고, 얼러주면 재미난 듯 빙긋 미소를 짓기도 하는 품이 여간 귀엽지 않다. 고것을 돌려가며 안고 얼러대느라 법석이 그칠 줄 모른다. 저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눈동자 굴리기가 바쁘다.

문 밖에선 앙상한 나뭇가지를 할퀴듯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유리창에 금이라도 지울 듯한데, 집 안은 아이들의 따뜻한 몸기운이며 말소리가 뒤섞이면서 마치 화덕이라도 피워 놓은 것처럼 후끈하다. 늘 두 식구만 서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거나 적적한 일상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이 아이들이 법석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어지럽기도 하지만, 비로소 사람 사는 것 같아 속에서 든든한 무엇이 차오르는 것 같다.

이래서 명절을 명절이라 하는 걸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딸아이와 함께 이 명절날을 즐기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다. 제가 가서 좋은 날을 받들고 즐겨야 할 곳이 따로 있거늘, 그 즐거움을 이 늙은이들이 가지기가 조금은 민망한 생각이 들어, 딸아이와 사위를 향해 걱정을 하니, 염려하지 말라며 그믐날 아침에 일찍 돌아가서 차례 준비를 하고, 어른들과 함께 설을 쇨 것이라 한다.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당부를 하고, 아무 일이 없는 듯 또 법석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제 어미와 함께 읍내로 나가더니 장을 봐 왔다. 밤에는 그득한 상이 차려졌다. 잡채도 오르고 회도 올랐다. 아이들은 친하게 지내는 이웃 성 선생네 부부도 부르라 했다. 거실이 가득 찼다. 술잔을 순배로 돌리면서 건강과 화목에 관한 덕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남정네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다가, 문득 아들이 일어서더니 커다란 케이크 상자를 상 위에 얹는다.

무슨 일이냐 했더니, 제 어미의 생일을 축하하는 거란다. 생일날은 정월 초이렛날이건만 한 주일 뒤에 다시 오기 어려워 당겨서 생신 축하를 드린다는 것이다. 엉겁결에 생일 축하 파티가 이루어졌다. 촛불을 켜고 어린 것들이 선창하여 축가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 한촌에서는 처음 맞는 아내의 생일이라 좀 특별히 기리고 싶기도 한데, 아이들은 아랑곳 않고, 제 어미에게 선물을 건네기도 하며 축하에만 바쁘다. 어찌하였거나 아내는 아이들의 그 모습이 즐겁기만 한 듯, 얼굴에 연신 웃음꽃을 피운다. 얼떨결에 축하객이 된 성 선생 내외는 박수와 탄성으로 아내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찬바람 부는 세밑 겨울밤이 박수 소리 속에서 모락모락 깊어갔다.

이튿날 딸 식구는 이른 세배를 하고 저희 설 쇨 곳을 향해 떠나고, 아들 식구와 우리 부부는 우리의 설 쇨 곳을 향했다. 다시 형제며 그 슬하들을 만나 제석(除夕)을 함께 하면서 명절의 정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부모님 신위 앞에 엎드려, 저희 이리 화기롭게 살고 있으니 세상 걱정 거두시고 편히 쉬시라며 맑은 술로 잔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 한 해가 빠져 나간 자리에 새 정을 담은 해를 채울 것이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라./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라,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라 한 어느 선사의 말씀처럼, 해가 가고 오는 것이야 그리 대수로울 일은 없을지라도, 명절이란 만남이 있어 좋고 따뜻함이 있어 좋은 날이지 않은가, 설레는 날이지 않는가.

세월이 나에게서 다 빠져 나가는 날까지 설날은 명절 좋은 설렘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2012.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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