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촌의 겨울 밤

이청산 2012. 1. 9. 18:35

한촌의 겨울 밤


한촌의 겨울밤은 참 길다. 동지를 지나고 해가 바뀌었는데도 겨울밤은 길기만 한 것 같다. 한촌의 겨울밤은 마을을 감싸는 땅거미와 함께 정적에도 깊이 싸이게 한다. 집집마다 창 밖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사람 사는 곳임을 알려 줄 뿐이다. 그 희미한 불빛 속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재롱을 피울 손주도 없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아들딸도 없다. 객지에 나가있는 것들을 생각으로나 만날 뿐이다. 함께 텔레비전에나 눈길을 모을 늙은이 부부, 아니면 홀로 밤을 지켜야 하는 할매들만이 지새우고 있는 한촌의 겨울 밤-.

어둠살을 타고 전화벨이 울렸다. 옆집 성씨가 윷 한 판 놀자고 했다. 부부 함께 성 씨 집으로 갔다. 이씨도, 조씨도 와 있었다. 성씨가 담근 술로 상을 차려 놓고 윷판을 벌인다. 남자 한 편, 여자 한 편이다. 지는 쪽에서 모두 똑 같이 얼마씩 내기로 한다. 윷을 던진다.

, 개 걸, , . 허공으로 올라간 윷가락이 바닥에 내려앉을 때, 윷이며 모가 나오거나, 바랐던 것이 나오면 손뼉에 함성에 판은 갑자기 시끌벅적해진다. ‘와 이리 좋노!’판이 방 안을 가득 메우거나 쾌지나 칭칭나네판이 방을 압도한다. 누가 한촌의 겨울밤을 적막하다고 했던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요, 오일장 장판보다 더 시끄럽다. 그 소요 사이에서 기울이는 술잔에 모두들 불콰해지고, 열 오른 얼굴만큼이나 겨울밤이 뜨끈하게 깊어간다.

이기는 편은 이기고 지는 편은 진다. 그런데 이겨도 져도 추렴하는 쪽은 한 편 뿐이다. 모두 남자 몫이다. 에이, 이기면 뭐해! 그래도 이겨야지. 그래 맞아, 내기는 이기고 보는 거야. 이걸로 뭘 하지? 분분한 논의 속에서 한촌의 겨울밤이 또 깊어간다.

이튿날, 성씨는 지난밤의 그 추렴으로 쇠머리나 사러 가자고 했다. 곰탕을 만들어 나누어 먹자는 것이다. 읍내 푸줏간으로 가서 쇠머리 하나를 반 잘라 사고, 여러 가지 뼈 몇 쪽을 샀다. 성씨는 술을 잘 담그기도 하지만 고기를 고아 조리도 잘한다.

성씨 집 뒤란에 걸린 가마솥에 쇠머리를 넣고 고기 시작했다. 애벌 곤 물은 퍼내고 다시 물을 부어 불을 지핀다. 하루 밤을 내내 지피고 이튿날 또 지폈다.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고 부연 국물이 우러난다. 뼈도 허물어질 정도로 따로 고아 곰국을 만들었다.

쇠머리가 다 고아진 날 밤, 사람들은 또 모였다. 고기가 참 맛있네. 쇠머리가 원래 맛있어. 잘 고아서 맛있는 거지, 원래 그렇기는? 이거 한번 먹어봐, 기름이 좀 붙어 있는 게 더 맛있는 것 같아. 고기며 국물을 안주 삼아 술잔을 나누는 사이에 한촌의 겨울밤은 소리 없이 깊어간다.

겨울밤은 술잔 속으로만 깊어 가는 게 아니었다. 누구네 집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추위를 잘 이기게 해주어야 할 것이라는 둥, 언제 어느 집 밭머리에서 고라니가 한 마리 잡혔다는 둥, 부산에 사는 누구네 집 사위가 굴을 많이 보내 회관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참 맛이 있더라는 둥, 이웃의 근황을 나누는 사이에 한촌의 겨울밤이 또 깊어간다.

그 뿐 아니었다. 시장이 국회의원 출마하려고 자리를 내놨는데, 시장 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 걱정이네. 요즈음 정치하는 사람들 행태를 눈 뜨고 못 보겠어. 앞으로 나라 정책이 농사일을 어떻게 만들까, 올봄 선거에 시의원으로 누가 나설꼬? 우리 지역에도 말께나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건데-, 그 고담준론(?) 속에서도 겨울밤이 소록소록 깊어간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끼리는 정답게 살아야지. 맞아, 그래야지. 그런 재미없으면 뭘로 살아? , 그렇고말고. ! 벌써 10시가 넘었네.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어? 이 방 참 따뜻하네. 고긴 누가 다 먹었어? 하하하~.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에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몰랐다. 정겨운 마음들은 긴 겨울밤도 짧게만 했다.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만 했다. 그 깊은 적막의 밤은 어디로 갔는가.

겨울이 가면 봄도 머지않나니-.(2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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