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동제(洞祭)를 올리며

이청산 2012. 2. 8. 20:30

동제(洞祭)를 올리며


오늘 대보름을 맞이해서 마을 신당에서 동제를 올립니다. 참여하실 분은 신당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미명의 신새벽에 이장의 카랑한 목소리가 회관의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손을 깨끗하게 씻고 얼굴도 정성들여 닦았다. 신목과 신당이 모셔진 마을공원으로 갔다. 이장이 자동차의 조명등을 밝혀 놓고 두어 마을사람들과 신당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을의 곡절 창창한 역사를 모두 안고 있을 듯, 수백 년은 됨직한 느티 노거수가 신당을 지키고 있다. 임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마을을 지나면서 지세를 보니, 큰 인물이 날 것 같아 혈을 끊어야겠다며 고갯마루에 큰 못을 박았다하여 못고개마을로 불린다는 그 역사를 저 나무는 다 새기고 있을 듯하다.

울타리를 둘러친 신당에는 큰상만한 반석이 제단으로 놓여 있고,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앉아있는 아름드리 고목이 제단을 감싸 안을 기세로 우람하게 버티고 섰다.

이장은 며칠 전부터 신당 주위와 마을 어귀 그리고 회관 출입문에 새끼를 꼬아 금줄을 쳤다. 그리고 마을로 드는 길섶 군데군데 황토를 깔아 부정이 드는 것을 막을 채비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 손에는 모두 제주로 쓸 술병이 들려 있다. 그 병에 저마다의 정성과 소원을 담았을 것이다.

이장과 몇 사람은 제단에 진설을 시작했다. 맨 앞에 떡판을 얹고 포며 과일을 차렸다. 모든 제물들은 마을사람들의 십시일반 추렴으로 장만한 것이다.

여명이 조금씩 비쳐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동제를 모시겠습니다.” 이장의 선언으로 제사가 시작되었다.

연세가 제일 높으신 최 씨 어른을 제주로 모시고, 집사는 젊은 김 씨, 축관은 나에게 맡겼다. 첫 참사(參祀)임에도 불구하고 독축을 맡기는 신뢰의 정이 고맙기만 하다.

촛불을 밝히고 제주가 초헌을 올리고 배례를 드렸다. 다음 어른과 이장이 아헌, 종헌 순으로 잔을 드리고, 마지막으로 신을 불러 마을의 안녕과 번성을 비는 축을 올렸다. 목청을 가다듬어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모았다. 독축 소리는 타오르는 촛불에 실려 신목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듯했다.

처음 참사한 예로 내가 잔을 더 올리겠다 하고. 약간의 성금을 제단에 얹고 집사가 따라 주는 잔을 받아 제단에 올렸다. 공수로 손을 잡고 읍하여 절하며 축원을 드렸다.

동신이시여! 이제 마을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정성 모아 절을 올리옵니다. 가상히 여기시어 이 순후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내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올해도 풍년 들어 번성하게 해 주시고, 모든 이 건강 보전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간곡한 마음을 모았다. 한 생애를 정리하고 이 마을 사람이 되겠다고 찾아와 처음으로 맞는 대보름이다. 그 대보름에 마을 사람이 되어 이웃들과 더불어 동제를 올리는 마음이 남달리 유별치 않을 수가 없다.

낯설고 물 설은 땅을 찾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랜 이웃인 듯 반겨주었다. 봄이 들어 여름이 지나 가을을 보내는 사이에 철철이 나는 푸성귀며, 곡식이며, 과실들을 서로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맛난 음식, 좋은 술이 있으면 서로 가르기를 내 집 같이 하며 살아온 한 해였다. 받는 정은 많으면서도 갚을 도리가 없음을 불안해 할 때면, 이웃들은 정 하나 있으면 되지, 다른 게 무슨 소용이냐!’며 따뜻이 손을 잡아 주었다.

헌작이 끝나고 제단 한 자리에 정갈하게 마련해 둔 동소지(洞燒紙)를 모두 한 장씩 들고 불을 붙인다. 재가 허공을 날아 높이높이 오르라 한다. 날아오르는 재에 다시 원을 싣는다.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전국 100선 못고개마을에 올해도 대풍 들어 번성하고, 동민 모두 무사 무탈 무병 평안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정이며 일신의 소원을 소지에 담아 날렸다.

철상한 제물을 들고 회관으로 간다. 부인네들은 벌써 오곡밥 푸짐한 상을 차려 놓았다. 부름을 깨물고 술잔을 돌려 음복을 한다. 무병장수 풍년 번성을 다시 한 번 축원하며 음복의 잔을 나눈다.

상을 물리고는 대동 윷놀이 판을 벌인다. 아랫마을 윗마을로 편을 갈라 내기가 벌어진다. 윷을 높이 던진다. 정도 함께 따라 올라간다. 희망도 따라 오르고 원도 따라 오른다. 윷가락이 내려앉기 바쁘게 함성이 터진다. 함성에는 편이 없다. 그 함성 속으로 풍년 대보름날의 푸근한 햇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2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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