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 해를 보내며

이청산 2012. 1. 2. 20:27

한 해를 보내며


청년회특우회에서 새해 새 아침 여명에 유서 깊은 고모산성 전망대에서 해맞이 행사를 개최한다며 초청장을 보내왔다.

해마다 지역의 발전과 화합을 기원하며 하는 행사를 작년에는 구제역 파동으로 열지 못했다. 근년에 몇 해 동안 초청을 받아 축시 낭독을 해왔는데, 올해 다시 행사를 개최하면서 또 나에게 낭독을 요청했다.

늘 같은 사람이 비슷한 말로 축복을 드리는 것이 무슨 큰 의의가 있겠느냐며 사양을 했더니. 행사를 추진하는 분이 인제 진짜 주민이 되었지 않습니까!’라면서 기어이 해주셔야 한다고 강권했다.

진짜 주민! 그러고 보니 이 땅에 내 터, 내 집을 가지고 맞는 첫 새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섬광 같은 빛이 되어 폐부를 스친다. , 내가 이제 이 땅의 명실상부한 주민이구나.

문득 유태교의 어느 선지자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너는 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이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과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세월 속을 흘러 어디쯤에 와 있는가?

돌아보면 한 해를 지나온 일이 꿈들만 같다. 꿈같이 획기적이기도 하고, 꿈결 같이 은근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지난겨울의 끄트머리에서 한 생애를 마감했다. 예정된 일이긴 했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은 엄청난 변화였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월이 흘러가듯,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게 모르게 지니면서 살아왔던 세속의 작은 티끌까지도 모두 내려놓기를 애쓰면서 그간의 일들을 모두 매듭지었다.

 

새 삶의 터를 잡아 새로운 집을 지었다. 회색의 빌딩숲을 벗어나 초록의 나무숲이 있는 곳, 인위의 거친 호흡 속을 벗어나 자연의 맑은 숨소리가 있는 곳으로 옮겨왔다. 한 생애의 마감이 쉽지 않았듯, 새 삶의 갈무리도 쉬울 수가 없었다. 모든 속내를 한 번 더 비웠다.

새와 푸나무의 친구가 되려 했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기를 소망했고, 인심과 인정을 가꾸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한 해를 지나면서 돌아보면 참 고마운 존재들이고,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애써 가꾸려 하지 않아도 새와 푸나무들은 벗이 되어 주었고, 애써 흐름을 쫒지 않아도 물과 바람은 늘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그 새와 푸나무, 물과 바람 덕분이었을까? 빌딩 속을 살 때 늘 병고와 힘겨운 씨름을 해오던 아내가 일신의 고달픔을 시나브로 털어가더니, 이제는 제법 푸나무와도 섞이고 바람과도 어울려 잘도 지낸다. 푸나무와 바람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더 고마운 건 사람들이다. 참 낯선 고마움이었다. 내 일찍이 어느 때에 이런 이웃을 만나본 적이 있었던가. 가능한 모든 사정을 다 알려 하고, 모든 일들을 다 알려 주려하는 사람들, 가능한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려하면서도, 나누어 준 만큼 받으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것이 인심이고 인정인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내 살아온 세계의 익숙한 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해를 건너오면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고, 사람의 정이 어떠해야 하는 것을-. 그 감회를 담아 어느 일간지 에세이란에 대문을 괜히 달았다며 글을 썼다. 대문이 필요 없는 마을에 굳건한 대문을 달아 집을 지은 것을 뉘우친 것이다. 우리 동네의 정겨운 모습을 부러워하는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웃들은 더욱 모든 것을 나누어 주려했다. 그것은 이웃이 나에게 서로 나누고 사는 삶을 숙제로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또 하나, 내 한 해를 보내면서 여느 해를 보낼 때와는 다른 감회 하나를 술회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낭송예술과의 만남이다. 낭송예술이란 문자로 표현된 문학작품을 낭송가 특유의 해석과 감정이입을 통하여 음성언어로 재현해 내는 예술 행위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창조다. 가수에 따라 노래의 감동이 달라질 수 있듯이, 같은 작품일지라도 낭송하는 사람에 따라 감동과 아름다움이 달리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새로운 생애의 한 부분을 기대고 싶을 정도로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된 그 낭송예술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낭송예술가 님과의 만남에서부터였다. 한 생애의 마감을 몇 달 앞둔 어느 여름날, 님의 지도를 받아 어느 문학 단체의 시낭송회에 출연하게 되면서, 낭송예술의 아름다움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만남은 내 삶의 한 부분을 바꾸어 갔다.

그 인연으로, 님의 주도로 낭송예술 동호인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활동하는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난 한 해에 내가 얻은 소중한 보람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생애를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부족함 없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계기를 주신 님이 고마울 따름이다.

푸르고도 따뜻한 새 삶의 터를 얻은 일과 아름다운 삶을 가꾸게 해주는 낭송예술을 만난 것만으로 한 해를 보내는 감회가 가득하다. 그것들이 지난 한 해의 내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기도 하다.

올 한 해를 돌아보는 마음속에 고마움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하다. 맑고 푸른 자연이 고맙고, 정겨운 이웃이 고맙고, 건강을 찾아준 아내가 고맙고, 아름다운 삶을 안내해 준 님이 고맙다. 그 고마움이 올해만이 아니라 영원히 나의 것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일 새 아침이면 지역의 유서 깊은 성곽 고모산성 마루에 새 해를 맞으러 간다. 새해 축시의 제목은 영원한 고향 마성이여!’로 정했다. 이제 내 새로운 삶의 터 마성은 몸과 마음의 영원한 고향이 될 것이다. 영원한 고마움이 살아있는 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고마운 신묘년이여, 잘 가라! 그리고 만사형통 흑룡의 임진년이여, 고맙게 오라,

다시 한 번 돌아본다. 나는 지금 이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는가?(201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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