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도토리 한 봉지

이청산 2011. 10. 20. 14:08

도토리 한 봉지


주지봉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물들 것은 물들고 질 것은 진다.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남을 것은 남는다. 해거름 가을 빛살이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를 파고드는 산길을 따라 주지봉 가파른 길을 오른다.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날마다의 걸음이다.

주지봉을 오르자면 마지막 힘을 내어야 하는 가풀막에 일백일흔세 개의 가로목 계단이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그 아래에 숨을 좀 돌렸다가 오르라는 듯 좁다란 벤치가 하나가 놓여 있다.

오늘도 주지봉 마루에 올라 색색의 가을빛이 향연을 벌이고 있는 산야며 그 자락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있는 동네, 내 삶의 터를 한참 조망하다가, 영송의 손짓처럼 흔들리는 갈꽃의 배웅을 받으며 봉우리를 내려온다.

층층이 놓여있는 계단을 하나하나 헤아리듯 내려오며 시나브로 짙어져가는 단풍 빛에 젖어들다가 보니, 저 아래 벤치에 올라올 때는 보이지 않던 까만 비닐봉지 하나가 눈길을 머물게 한다. 봉지를 헤쳐 보니 도토리 몇 움큼이 들어 있다. 누가 지금 도토리를 줍고 있나? 둘러봐도 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줍는 중에 잠시 놓아 둔 걸 거라 생각하며 내리막을 찬찬이 걸어 산을 내려왔다.

나도 주지봉을 오르내리다가 도토리가 보이면 주머니에 주워 넣어 오곤 하지만, 올해는 작년보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밤도 작년보다 영 적게 떨어진다고 한다. 며칠을 주워 모아도 한 됫박도 옳게 되지 않는다.

다음 날도 여느 때처럼 주지봉을 오르는데, 벤치의 도토리 봉지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 도토리를 주우러 산을 돌아다니던 사람이 벤치에 둔 것을 잊어버리고 그대로 두고 간 걸까, 기억이 나면 가지러 오겠지, 하고 봉우리에 올랐다. 내려 올 때 보니 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매일 해거름이면 주지봉을 오르내리는 내 걸음을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터라, 혹 날 가지라고 둔 것은 아닐까. 적은 양이 별 쓸모가 없어 나더러 보태어 가지라고 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마운 일이라 여기며 주머니에 함께 넣으려다가 다시 생각하니, 주운 사람이 잊어버린 걸 기억해내는 대로 다시 가지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가져 갈 거라고 생각하며 그 봉지 안에다가 무슨 유해 물질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지난여름 어느 날, 주지봉 마루에 오르니 누가 아래위를 얌전하게 잘라낸 사과 한 알과, 오이 한 토막을 봉우리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 표지판 위에 정갈하게 얹어 놓았다. 내가 오르기 조금 전에 둔 것인 듯 물기도 마르지 않고 빛깔도 그대로다. 내가 날마다 오르는 것을 안 누가 날 먹으라고 두었나? 그러나 누가, 왜 두었는지, 무엇이 묻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덜컥 주워 먹을 수가 없었다. 이 도토리도……?

만약 그렇다면 누가 나한테 무슨 원한(?)을 가졌길래 나를 헤치려 한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특히 이 한촌을 살면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본의 아니게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웃과 다투거나 싫은 소리 한 마디 한 적도 없는데……. 오히려 이웃들의 따뜻한 인정에 감동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설마 누가 나를 헤치려 할까? 공연한 망념이겠지. ‘의심암귀(疑心暗鬼)’라는 말이 있다.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둠의 귀신을 낳는다는 뜻으로, 곧 의심을 하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이 솟아나 불안해진다는 말이다. 남의 호의를 무람없이 의심하여 괜한 불안을 느끼는 것 같아 계면쩍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짐승이 와서 물고 갈지도 모르는 일이라, 주운 사람이 이 도토리가 생각날 때는 언제든지 가져가라고 봉지의 아구리를 묶어 반듯하게 놓아두고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올라가도, 또 그 다음 날 올라가도, 도토리 봉지는 아구리가 묶인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주인이 까마득히 잊어버렸거나, 체념을 했거나, 내가 가져갔을 거라고 생각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덥석 가져가기에는 무렴한 일이고, 다람쥐에게나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람쥐의 제일 양식이 바로 도토리가 아니던가. 묶었던 아구리를 풀어헤쳐 놓았다. 다람쥐가 마음 놓고 먹으라고 산에 흩뿌릴까도 생각했지만, 혹 주인이 늦게라도 생각나면 남은 거라도 가져가라고 헤쳐 놓기만 했다.

며칠을 두고 오르면서 보니, 봉지에 든 도토리가 조금씩 줄어가는 것 같더니, 어느 날은 바람에 날아갔는지 봉지조차 보이지 않고, 몇 알의 도토리만이 벤치 위를 하릴없이 구르고 있었다. 다람쥐가 다 먹었다면 좋은 일이 되었겠다 싶어, 벤치 위를 미끄러져가는 바람처럼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발등에 단풍잎이 얹히는 숲길을 걸어 산을 내려왔다.

벤치 위를 구르던 도토리를 생각하니, 일전 어느 신문에 실린 재벌 회사의 커다란 그룹 광고가 떠오른다. 푸른 숲속의 바위에 조그만 다람쥐가 앉아 있는 큼지막한 사진 아래에 열매 한 알, 다람쥐에게 주면 한 끼일 뿐이지만/ 땅에 심어주면 더 많은 먹거리가 되고 그늘이 되고 보금자리가 됩니다.” 그 합리의 언사 속에 숨겨져 있을 인간 중심의 비정한 논리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더 많은 먹거리와 그늘과 보금자리를 위하여 작은 다람쥐는 굶어도 좋단 말인가.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이 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땅에 심는 일보다 다람쥐가 먹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열매를 땅에 심는 일이나 다람쥐가 먹는 일이나 같은 가치가 될 수는 없는 일일까. 그 열매를 나와 다람쥐가 갈라 먹으면서 서로 정답게 살 수는 없는 일일까.

이 가을, 한 봉지의 도토리를 보며, 사람의 마음을, 인간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201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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