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을의 정

이청산 2011. 9. 26. 10:03

가을의 정



어제는 누가 늘 열린 대문 안에 열무 한 움큼을 두고 가더니, 오늘은 또 누가 애호박 하나를 살짝 놓고 갔다. 나중에야 다 알게 되겠지만, 줄 때는 말없이 슬쩍 두고 간다. 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다.

 

가을이 오고 있다. 산에 듬성듬성 누런 잎이 보이기 시작하고, 푸르기만 하던 논들이 어느 새 노란 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매미소리도 잦아들고, 아침저녁으로 선득한 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든다. 여름 내내 불을 넣지 않던 방에 밤에는 조금씩 불을 지핀다.

모든 열매들이 익어간다. 사과는 벌써 익어 장으로 많이 팔려 나갔고, 감나무에는 감이 전등불처럼 불그레한 빛깔을 켠다. 넓적한 잎사귀를 한껏 벌린 배추며, 이파리를 고추 세운 무가 밭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저런 것들을 가꾸어 다듬기 위하여 지난여름은 참 많은 땀을 흘렸다. 이 가을의 결실을 위해 여름에 땀을 흘리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방충망을 쳐도 밤이 되면 물것들이 날아들어 잠을 설치게도 하지만, 온갖 것들이 자라나는 여름에 당연히 있을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름이 지나 이제 모든 것들이 결실을 향해 간다. 지난여름에 비가 좀 많이 내려 나락이며 과일들이 잘 익어줄까 걱정했지만, 땀을 많이 흘린 덕분인지 벼는 고개를 깊숙이 늘어뜨리고, 논두렁의 콩도 제법 토실한 꼬투리가 달렸다. 어쩐 일인지 호박이 많이 안 달린 듯하지만, 그런대로 줄기마다 큰 것은 누렇게 익어가고, 작은 것은 윤기를 반짝이며 커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흐뭇하고 넉넉해진다. 저런 것들이 무럭무럭 자라주는 여름이 있고, 토실한 열매를 맺어주는 가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땀을 흘려야 할 철도 있지만, 결실의 즐거움도 느낄 철이 있다는 것이 여간 좋지 않다.

집집마다 다 있는 것들이지만, 먼저 익은 것도 있고 나중 익는 것도 있어, 익는 대로 서로 갈라먹고 싶어진다. 서로들 주고받으며 나누어 먹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크고 작은 경작지를 가지고 여러 가지 농작물을 가꾸어 내지만, 나에게는 마당에 고작 조그만 텃밭이 있을 뿐이어서 없는 게 많다. 고추며 푸성귀가 조금 날뿐이다.

사람들이 그걸 알고, 무얼 자꾸 가져다준다. 그럴 때마다 우린 어떻게 보답하지요, 이 고마움을…….’을 하면 사람들은 보답은 무슨, 이 게 사람 사는 정이지.’라고 한다. ‘사람 사는 정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감격스럽다. 돌아보면 그 걸 참 잊어버리고 살아온 것 같다. 그저 혼자서 살기에만 바쁜 걸음을 치며 바동대어 온 것 같다.

한촌에 삶의 터를 잡고서 처음 맞는 가을이다. 꽃들이 찬연했던 봄도, 녹음이 무성했던 여름도 온통 감격으로 살았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이며 싱그러움 속에서 많은 희열도 느꼈다. 창 앞에 펼쳐져 있는 논들의 푸른 것들이 변해 가는 모습에서 경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봄과 여름이 간 자리에 모든 것들이 익어가는 가을이 들어앉았다. 열매만 익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도 익어갔다. 발갛고 따뜻하게 익어갔다. 그 익은 마음들이 여러 집 대문을 서로 넘나들었다.

법정 스님은 물질이건 마음이건 무엇인가를 이웃과 나누어 가질 때 그 일이 곧 덕행이 되고 안락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했다. 그랬다. 그건 정녕히 안락이고 기쁨이었다. 주는 정, 받는 마음이 안겨주는 편안함이요, 즐거움이었다. 모든 것들이 익어가는 가을의 정이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해거름 망두걸*에 동네 할매들이 모여 앉았다. 하루를 지낸 일들이 풀벌레소리와 함께 풀어진다. 엊그제 장에서 사온 포도 몇 송이를 내어 갔다.

이런 걸 자꾸 주시면 우째여…….”

맛있게 드시라 하고 돌아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한 할매가 냄비를 들고 뒤따라온다.

햇 찹쌀로 수제비국 한 번 끓여 봤어여! 잡숴 보소.”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논들머리에 앉아 호박꽃 같은 웃음을 피워내고 있는 할매들 사이로 정 깊은 가을밤이 새록새록 짙어간다. 별빛이 점점 또렷해진다. (2011. 9. 25.)

 

*망두걸 : 마을 앞 논들머리 길 가장자리에 있는 조붓한 빈터. 옛날에 망두석이 서 있던 자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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