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그리움의 등짐만은

이청산 2011. 10. 9. 14:18

그리움의 등짐만은


들판이 온통 노란 물결이다. 논들에 푸른빛이 점점 짙어지는가 싶더니 쑥쑥 자란 잎들 사이로 이삭이 패어났다. 이삭에 낟알이 늘어 가면서 서서히 고개를 숙이더니 푸른빛이 가시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시나브로 비켜난 자리에 노란빛이 들어앉으면서 이삭의 고개는 더욱 늘어지고, 논들은 황금의 천지를 이루었다. 저 찬란한 빛은 머지않아 드러눕게 될 것이다. 알곡을 남기고 한 세상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 노란 물결 위를 잠자리들이 날고 있다. 때로는 잎사귀에 앉고 이삭에 앉기도 하면서 아주 가벼운 날개 짓으로 경쾌하게 날고 있다. 지금 내 삶의 모습처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신경림 : 집으로 가는 길

 

한 생애를 마감하고 물러나야 할 날을 몇 달 앞 둔 한 여름 날, 어느 산자락 공원에서 시낭송회가 열렸다. 나는 출연자가 되어 그 시 속에 감정을 몰아넣고 있었다. 한 생애의 석양을 맞으면서 모든 걸 다 묻어버리고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고 한 그 시는 싶다라는 원망형(願望形)의 종결어미로 시작되었다. 그 시가 나에게로 와서 빠지고 있는지, 내가 그 시 속으로 함몰되어 가고 있는지-, 마치 그 시가 내 삶의 모습이고, 내 삶이 그 시 속의 가락이 되어 있는 듯도 했다. 시는 마침내 종반에 이르렀다.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하고 끝났다. 객석에서는 박수소리가 울려오고, 무대를 내려오는 걸음 위로 눈자위가 시려왔다. 그리고 몇 달 뒤 겨울의 끝자락에서 나는 한 생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조용한 시골을 찾아왔다. 그 시골의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흐르고 있다. 내가 조용한 시골로 삶의 터를 옮긴 것은 은둔이 아니었다. 번다와 분주를 내려놓고 본연으로 살고자 함이었다. ‘싶다의 원망형이 아니라, ‘있다의 진행형으로 살려 함이었다. 고맙게도 그 현재 진행형의 삶이 내게로 와 주었다. 내가 지고 있던 번다와 분주의 짐들이 벗겨지기도 했지만, 벗어버리기도 했다.

어깨를 무겁게 누르던 책무들을 벗은 것이 무엇보다 홀가분했다. 수행해야 하는 과업에 노심초사하던 짐, 모든 관계의 조정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짐들이 벗겨졌다. 불면의 밤도, 분노도, 원망도 다 씻겨나갔다. 세월의 은혜던가, 당연한 굴레로 져야했던 가족의 짐에서도 벗어났다. 언제나 내 옆을 지키는 사람 말고는 다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삶의 속박과 의무가 물러난 자리에 자유의 즐거움이 들어앉았다. 순후한 이웃을 만났다. 저 산의 나무들처럼, 저 강의 물처럼 순수하고 정다운 이웃들이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참 가볍다. 저 들판의 잠자리보다 더 가볍다. 아니 할 말로, 지금 내가 저 하늘을 못 본다 한들, 애석하여 눈을 감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아침마다 걷는 산책길이 가볍다. 논두렁에 맺힌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다 적셔도 걸음이 가볍다. 동녘 산마루에서 번져 나오는 햇살이 부신다. 그 햇살 받은 강둑이 정겹다. 들판에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이 마음을 유족에 젖게 한다.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진다. 참 가볍게 걸어가고 있다.

, 그런데, 정말 내 걸음이 가벼운가. 이리 가볍게만 걸어가서 되는 건가. 가벼운 걸음이 때로는 허허롭게 느껴질 때가 있음은 무엇 때문일까. 누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말을 했다던가. 날아갈 것만 같은 이 가벼운 발걸음을 땅 위에 조금은 붙여두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을 때가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그랬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도, 결코 내려놓고 싶지 않은 게 있다. 좀 힘이 들더라도 지고만 가고 싶은 짐이 있다. 사랑이라는 애달픈 짐이다. 그리움이라는 고단한 짐이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고 싶다. 그리운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이 숨 쉬고 있다는 것, 사랑이 살아 있다는 것은 삶에 윤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 사랑이 없는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파삭할 것인가, 얼마나 팍팍할 것인가.

사랑에서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니, 사랑하는 사람을 애써 만들지 말라고 어느 불전(佛典)에서 경계해 마지않은 사랑일지나, 사랑의 짐마저 놓아버린다면 이 풍진 세상을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으로 생애의 의미를 점철할 수 있을까. 사랑이 근심과 두려움을 줄지라도,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고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싶다. 어느 시인은 사랑은 '하였다' '하리라' 도 아니고, 언제나 사랑은 '한다'이다.”라고 했다. 그 현재 진행형의 사랑으로 언제나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내 한 생애의 훗날에 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정호승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에서

 

내 등의 짐은 사랑의 짐, 가벼운 걸음 위에 사랑의 그리움만은 등짐으로 지고 가련다. 갖은 짐을 마다 않고 살아왔던 지난 생애처럼. 가볍게 걸어가고 있는 나의 등 위에 그 그리움의 짐을-.(20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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