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을 점묘(點描)

이청산 2011. 10. 25. 15:43

가을 점묘(點描)


나를 가을 들판에 내 놓지 말아요. 제어가 안 돼요. 혼자 할 게요. 흙을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그리 좋을 수가 없어요. 아내의 손길이 바빠졌다. 들깨를 쪄서 말리고, 고춧대를 베어 고추와 잎을 따고, 널브러진 배추의 잎을 짚으로 묶었다. 고춧대를 뽑아낸 자리에 얼갈이 무와 배추, 케일 모종을 심었다. 내가 함께 하려 해도 굳이 혼자 하겠단다. 흙은 어떻게 주물러도 만지는 대로 모양을 지어 주니 참 좋다고 했다. 어디에 무얼 심든 손 가는 대로 따라 주는 것도 여간 즐겁지 않다고 했다. 아내는 언제 점심때가 되는지, 저녁때가 되는지를 잊어버린 채 밭일에 매어 달리곤 했다.

콤바인이 논들을 달리고 있다. 육중한 기계가 지나갈 때마다 짚이 된 벼가 논바닥에 깔린다. 마음을 한껏 푸지게 하며 출렁대던 벼들이 알곡을 남기고 속속 들판에 드러눕는다. 저렇게 드러눕위하여 봄을 보내고 여름을 지나 이 가을까지 왔다. 저 알곡을 위하여 긴 시간을 물속에 흙 속에 뿌리를 박아왔다. 무거워진 이삭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몸을, 이제는 툴툴 털고 논바닥에 눕혔다. 마치 왼심을 다해 살아오던 한 생애를 접고 고요히 한촌을 살고 있는 어떤 이의 삶처럼-.

벼가 남긴 알곡은 길을 따라 내쳐 긴 무늬를 이루며 길바닥을 장식한다. 밤이 되면 긴 이불에 싸였다가 해 뜨는 아침이면 이불을 걷어 내고 다시 긴 길의 긴 무늬가 된다. 알곡의 주인은 강보에 싸인 어린 것을 돌보듯 추울세라 젖을세라 이불을 씌우기도 하고 벗기기도 하며,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시시로 다른 문양을 연출해 낸다. 햇살은 그 문양을 따라 알곡 속을 고르게 파고든다.

아직은 들판에 서서 만추의 따끈한 볕살을 더 쬐고 있는 것도 있지만, 들판에 서 있는 것이나, 알곡이 되어 길바닥을 수놓고 있는 것이나 어느 것을 봐도 흐뭇하기만 하다. 저 충실한 이삭이며 토실한 알곡을 보고 있으면 마음부터 넉넉해지는 것 같고, 햇것을 맞이할 생각을 하면 마음이 먼저 새뜻해지는 것 같다. 그 마음을 얻기 위하여 지난 계절엔 참 많은 땀을 흘렸다. 저 햇것의 맛은 고소하고도 짭조름할까. 사랑의 손길과 정성의 땀이 만들어낸 그 맛은-.

옆집 성 선생이 집을 떠난 지 두 주일이 넘었다. 농산물품질관리원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퇴임하고 나처럼 한촌을 찾아와 살고 있는 그는 벼 감식 전문가다. 해마다 이즈음 같은 추수철이 되면 지난날 근무지였던 곳의 농협에서 그를 부른다. 올해도 불려갔다. 지금 그는 벼 알곡과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알곡 벼가 포대에 담겨 그의 앞에 쌓인다. 삿대로 포대를 찔러 알곡을 꺼내어 보고 품종과 품질을 감별한다. 그는 참 힘들겠다. 무사히 통과시킬 때는 마음이 가볍겠지만, 통과가 안 되어 돌려보낼 때는 얼마나 민망한 마음일까. 애써 지은 거라고 항변도 할 텐데-.

이웃에서 금방 밭에서 딴 거라며 호박 한 덩이를 들고 왔다. 푸르고 누른빛이 어울려 있는 제법 큼지막한 것이 둥글 넙적 잘도 생겼다. 썽둥썽둥 썰어 전을 부쳤다. 구수하고 고소한 맛이 돈다. 들길에 늘린 벼를 고무래로 긁으며 말리고 있는 이웃에게로 가져간다. 고마워요, 고맙긴 제가 고맙지요. 막걸리 한 잔에 호박전 한 쪽-. 참 맛있단다. 전도 술도 맛있고, 정도 맛있단다. 이 때 성 선생이 있으면 좋겠지요? 글쎄 말이지요.

성 선생은 벼 감식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술 담그는 일에도 전문가다. 그는 곡물의 발효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연구대로 술을 담그고, 그 술을 종종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발효 장치가 있는 그의 연구실은 이따금 동네의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그가 벼 감식하러 떠난 후로는 사랑방의 문도 닫혔다. 한 열흘은 더 걸릴 거라 한다. 가을이 참 쓸쓸하지요? 잔을 함께 들던 이웃과 마주보며 웃었다.

창 너머 산의 빛깔이 변전하고 있다. 천천히 흐르는 동영상 장면 같다. 초록빛이 조금조금 물러난 자리에 프리즘을 막 통과한 빛살 같은 연노랑, 진노랑, 연홍빛, 다홍빛, 자줏빛 들이 살몃살몃 들어앉는다. 아무리 살며시 들어앉아도 어느 날엔가 저 산은 온통 울긋불긋 화원이 될 것이다. 보는 이의 가슴을 울렁이게 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가슴을 흔들어 놓고는 한 잎 두 잎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마치 내게서 빠져 나가는 세월처럼-.

점심 술을 놓자마자 아내는 또 밭으로 나간다. 가을 흙이 아내를 자꾸 불러낸다. 엊그제 심어 놓은 케일이 너무 배다며 캐어서 이리저리 옮긴다. 저녁에 겉절이를 해먹자며 배추 군잎을 뜯어내고 삼동초를 솎았다. 이웃에서 고추장을 한 사발 들고 왔다. 갓 담근 거라며 맛을 보라고 한다. 아내는 손에 든 삼동초를 이웃의 손에 건넨다. 그리고 서로 웃었다.

그 웃음 속으로 가을이 흐르고 있다. 깊어지고 있다.(20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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