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논들 가로등이 켜졌다

이청산 2011. 9. 15. 10:17

논들 가로등이 켜졌다


 

논들이 펼쳐져 있는 대문 앞에 가로등이 켜졌다.

여름 내내 동네의 밤길엔 달빛, 별빛 말고는 빛이라곤 없었다. 달과 별이 뜨지 않는 밤은 그야말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어둠이었다. 사람들은 어둠 속을 잘도 저어 다녔다. 어둠 속 다니기를 아예 체념하기도 했다. 해가 지면 집에 들고 어둠이 짙어지면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밤거리를 그들은 꿈도 꾸지 않았다.

초여름에 심은 모가 점점 뜨거워지는 햇빛을 받으면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연초록이던 빛깔이 시나브로 짙은 초록으로 변해갔다. 그 사이에 농부들의 땀은 마를 날이 없었다. 요즈음은 모든 일을 기계로 한다지만, 물을 대기도 하고 빼기도 하고, 피도 뽑고 주변의 잡풀도 치고, 일손은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논밭의 모든 것들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손 가는 대로 큰다고 했다.

그 발자국 소리와 손길을 따라 모는 점점 자라 벼가 되어 갔다. 여름이 익어가면서  이삭이 세상의 빛을 찾아  뾰족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그 즈음에 동네의 가로등은 모두 꺼졌다. 낮에는 구슬땀으로 분주하던 일손도 밤에는 어둠과 고요 속에 묻혔다. 저녁때면 망두걸에 모여 놀던 사람들도 어둑해진다 싶으면 땅거미를 등에 지고 모두들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망두걸은 논머리 동네길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사람들의 놀이마당이다. 어둠을 헤치고 뿔뿔이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길을 왜 이리 어둡게 하느냐고, 사람 사는 동네가 이리 어두워서 어찌하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밤의 불빛이 벼가 이삭을 패고 여무는데 큰 지장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논에 벼가 자라는 일이란, 그들에게 있어서 자식이 커가는 일보다 더 소중할 수도 있다.

벼는 이삭 패기 전후 7일에서 40일 경, 시기로 따지면 대충 6월 하순에서 8월 중순까지가 야간 불빛에 아주 민감한 시기인데, 일단 이삭이 패고 나서면 조금씩 둔감해진다고 한다.

연구에 의하면 밤에 불빛의 밝기가 2030룩스일 경우, 오대벼와 같은 조생종 벼는 이삭 패는 시기가 4일 정도 늦어지지만, 중만생종인 일품벼와 대안벼, 중생종인 광안벼와 화성벼 등은 밤의 불빛에 아주 민감하여 이삭 패는 시기가 10일 이상 늦어지고, 불빛이 밝을수록 시기가 점점 늦추어져 심하면 품종에 따라 한 달 이상 늦어지는 수도 있다고 한다.

불빛의 밝기가 이삭이 패는 시기만 늦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이삭이 패고 난 뒤에 여무는 속도도 늦고 품질과 수량도 떨어진다고 한다. 이삭은 불빛의 밝기에만 민감할 뿐만 아니라 불빛의 색깔에도 민감하여 푸른색이 나오는 수은등과 흰색이 나오는 백열등, 유백색이 나오는 형광등보다는 주황색이 나오는 나트륨등이 비교적 영향이 적다고 한다. 어차피 영향이 없지 않은 바에야 나트륨 등인들 왜 밝히려 할까.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감수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듯, 벼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토실한 알곡이 넘치는 풍요로운 추수를 위해서 이 어둠쯤이야 견뎌내지 못할까. ‘견뎌낸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정성 때문일까. 질펀히 펼쳐진 논들의 벼는 쑥쑥 이삭을 내밀더니, 제 머리 무게조차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속속 고개를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마음부터 넉넉해지는 한가위 명절이 다가왔다. 벼 이삭은 점점 고개를 깊이 숙여 갔다. 시퍼렇던 빛깔도 아침저녁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조금씩 누런빛을 띠어 가고 있다. 팔월 열나흗 날, 간간히 경운기 소리만 요란하던 마을길에 크고 작은 차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차가 멈추어 서자 어린것들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이 내리기도 했다.

그 날 밤 마을길에 가로등이 켜졌다. 참고 참아왔던 불을 켰다. 명절이 되어서이기도 했지만, 기다리던 자식들이 고향을 찾아와서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팰 이삭이 다 팼고, 불빛에도 별 지장을 받지 않을 만큼 여물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두었다가 좋은 날, 귀한 날 불을 켜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 밤에 마을사람들이 망두걸에 모였다. 누구, 누구네 집에서 추석 차례를 위해 마련해 놓은 부침개며 술을 들고 나왔다.

이게 얼마만인가! 불빛 아래 앉아 보기를…….”

글쎄 말이야! 풍년이 들어야 할 낀데…….”

그 표정은 이미 풍년이 든 듯도 했다.

늘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오늘 불빛 같은 희망을 다시 껴안았다. 사람들의 마음은 벌써 내일의 흥성한 차례 상 앞에 가 있었다.

마을길에 가로등이 켜진 날 밤-.(201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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